◎외형 키우는 효자노릇서 애물단지로 전락/제값에 제때 안팔려 되레 자금난 부채질사두면 손해보지 않는다는 「부동산신화」가 깨지고 부동산거품이 서서히 걷히고 있는 가운데 재계에서도 부동산을 통해 외형을 키우는 「부동산 만능경영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오히려 효자노릇을 할 것으로 보이던 보유 부동산이 팔리지 않고 금융비용만 부풀리는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렸다. 금융권도 부동산에 대한 담보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추세다.
이에 따라 상당수 재벌그룹과 중견기업들이 경기부진에 따른 군살빼기 1순위에 부동산 매각을 올려놓고 있는 상황이다.
김우중 대우그룹회장은 최근 『부동산투자에 대한 메리트가 없을 것』이라며 부동산투자를 최소화할 것을 지시했다. 문제는 부동산을 팔려고 해도 제값으로 제때에 팔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부동산만 보유하고 있으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종전의 상식이 통하지 않게 됐다. 안전경영의 담보기능을 상실한 부동산이 이제는 기업의 목줄까지 죄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 왜 사는가=기업이 덩치를 키우는 데 부동산만큼 손쉬운 게 없다. 부동산을 개발하면 땅값을 포함한 일체의 개발비용이 매출로 잡힌다. 대형건설사에 개발을 맡기면 돼 별다른 노하우가 없어도 가능하다. 잘만 하면 투자비용을 뽑고도 남는다는 기대심리가 없지 않음은 물론이다. 90년대 들어 나산그룹을 비롯한 거평, 신원, 한솔, 제일제당그룹 등 중견그룹들은 부동산을 매입하거나 보유부동산을 활용키 위해 앞다투어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또 사업다각화를 내건 진로와 두산 등 일부 재벌그룹은 그룹차원에서 계열 건설사를 육성하기 위해 부동산 투자를 대폭 늘렸다.
◇부동산이 목줄 죈다=나산그룹은 의류 위주의 사업구조를 유통과 건설업으로 다각화하기 위해 93∼95년에 걸쳐 서울 목동(6천7백평)과 수서(1만8천평) 등 수도권 금싸리기땅 4만여평을 집중 매입했다. 그러나 과다한 부동산 매입은 자금운영에 큰 부담이 됐다. 급기야 목동 백화점부지(1만3천평)에 대한 중도금을 내지 못해 지난 95년 서울시로부터 계약해지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자금악화설에 따른 제2금융권 여신회수 등으로 천호동 백화점부지를 현대백화점에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산은 보유부동산 매각에 성공, 그나마 다행이지만 진로·한일·대농그룹 등은 보유부동산을 처분치 못해 고심하고 있다.
한일그룹은 우성그룹 인수자금을 마련키 위해 경남 양산 소재 한일리조트를 내놓았지만 1년이 넘도록 팔리지 않고 있다. 한일리조트는 36홀 골프장과 놀이공원 등 총 70만평에 달하는 대규모 위락단지로 시가 3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부실징후기업군 1호인 진로그룹은 지난달 18일 20여건의 부동산 매각을 위한 공개 설명회를 개최했으나 서울 문래동 부지(1천평) 한건만 매각이 성사되는데 그쳤다.
대농그룹도 마찬가지다. 하나은행에 신갈연수원이 팔린 게 고작이다. 광화문 당주빌딩과 용인 물류창고, 관악컨트리클럽 등의 매각이 순탄치 않다. 또 삼미그룹이 자구책으로 내놓은 대치동 사옥 등도 매수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밖에 지난달 31일 부도를 낸 한신공영도 아파트부지 등을 팔아 3천억원의 자금을 마련키로 한 자구책을 지난 3월 서울은행에 제출했지만 단 한건도 매각이 성사되지 못해 지난달 30일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말았다. 다만 두산그룹은 영등포OB공장 부지를 자체 개발키로 한 당초의 방침을 철회하고 매각함으로써 자금조달에 큰 보탬이 됐다.
지난해 부도설에 휩쓸린 H그룹의 관계자는 『근거없는 부도설이 나돌면서 제2금융으로부터 어음결제 요구가 쇄도, 부동산매각 추진을 검토했다』며 『그러나 부동산 매각추진 사실이 알려질 경우 부도설이 기정사실화될까봐 포기했다』고 토로했다.
◇왜 팔리지 않나=경기침체에 따른 부동산경기퇴조가 1차적인 원인이지만 매수자가 매각대상 부동산을 헐값에 후려치는 속성도 또다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부동산을 공개매각할 정도라면 자금난이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를 악용, 반값에도 못 미치는 가격을 제시함으로써 협상이 진전되지 않는다는 것. 부동산 재벌이라는 우성과 건영그룹은 부채보다 자산이 많았지만 제때에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결국 부도로 쓰러졌다.<권구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