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가려져있던 크레스트 펀드가 SK㈜ 관계자를 직접 만나 협의에 들어감에 따라 정확한 지분 매입목적이 조만간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SK㈜는 일단 크레스트를 장기투자자로 우호적으로 보고 있으나 인수ㆍ합병(M&A)과 그린메일(경영권이 취약한 대주주에게 보유주식을 높은 가격에 되팔아 차익을 챙기는 행위)가능성은 여전하다.
또 재계 순위 3위의 SK(자산 47조)가 2,000억원도 채 안 되는 외국계 자본의 지분매입에 흔들리는 것과 관련, 논란도 적지 않다.
◇“지분매입 목적은 장기투자”= SK측은 크레스트의 지분매입이 장기투자라고 보고 있다. 크레스트측 대표자로 방한한 제임스 피터를 만난 유정준 CFO(전무)는 회사 관계자들에게 “크레스트는 SK㈜가 잘 돼야 자신들에게도 이익”이라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회사 상황 등을 물어왔다”고 말했다.
SK㈜의 IR팀 관계자는 “크레스트 펀드의 모회사인 소버린 자산운용은 장기투자를 주로 하는 기관투자가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삼성증권의 한 애널리스트도 “크레스트가 중ㆍ장기적으로 차익을 실현할 방법을 찾아 갈 것으로 본다”고 전망, 장기투자 관측을 뒷받침했다.
◇그래도 여전히 남는 의혹= 크레스트 펀드가 장기투자자로 보인다는 SK측의 설명에도 불구. 적대적M&A와 그린메일 등 악의적 투자의도는 여전히 배제할 수 없다. SK㈜는 1대주주로 올라선 크레스트를 자극하기 어려운 처지다. `장기투자`로 본다는 SK측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려운 이유다
정황상 장기투자로 볼 수 없는 측면도 많다. 크레스트가 장기투자를 목적으로 했다면 차근차근 바닥에서 SK㈜ 지분을 사모았으면 된다. 또 장기투자자가 글로벌 분식회계 여파가 아직도 진행중인 SK㈜를 투자대상으로 삼은 것도 석연치 않고 한 종목에 1,000억원이 넘는 자금을 쏟아부은 것도 쉽사리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영국 세종증권 애널리스트는 “장기투자라고 보기엔 크레스트가 너무 많은 물량을, 그것도 주가가 뛰는데도 거침없이 사들였다”면서 “SK㈜의 회사 상황을 파악하면서 M&A나 그린메일에 나설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1,700억원에 47조 기업이 흔들= 재계는 불과 1,700여억원을 투자한 외국자본의 힘 앞에 SK그룹의 경영권이 흔들리는 것은 출자총액규제 강화 등으로 정부가 기업활동을 제약해 온 결과로 보고 있다. 실제 SK그룹은 계열사와 특수관계인의 지분을 합하면 23.5%에 이르지만 이 가운데 17%가량이 출자총액제한, 상호출자 등에 묶여 의결권 행사가 불가능하다.
크레스트 펀드가 현재까지 확보한 지분은 12.39%에 불과하다. 전경련 관계자는 “결국 기업규제에 발목이 잡혀 대주주 지분율이 낮아짐으로써 외국자본의 M&A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측은 “이번 사건은 기업의 불투명한 경영과 지배구조, 위법에서 발생된 문제인데도 출자제한 문제를 끌어들이는 재계 주장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맞받았다.
<손철기자 runiron@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