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9일 사상 처음으로 5개은행을 퇴출시킨지 3개월만인 9월29일 합의에 의한 대규모 은행원 감원이 일단 성공했다.
인력감축을 둘러싼 9개은행의 총파업선언은 금융대란에 대한 우려와는 달리 사상초유의 「합의에 의한 대규모 고용조정」이란 결과로 막을 내렸다.
조흥, 상업, 한일 등 대형은행의 경우 지난해말 대비 32%이상 인력을 감축키로 합의했다. 당초 금융감독위원회가 요청한 40%수준에는 못미치지만 노조가 합의해 주기에는 버거운 규모다.
영업개시 이후에도 일부 대형은행노조가 파업을 고수, 일부 영업점에서 고객들이 불편을 겪기도 했지만 별다른 불상사 없이 인력감축에 합의했다.
노동시장 유연성이 부족하다, 구호만 있고 실천은 없다는 외국자본의 시각에 대해 「합의를 통해 실천하기 위해서 다소 시간이 소요됐다」고 답한 셈이다.
때문에 이번 합의는 은행구조조정의 걸림돌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의 국제신인도를 높이고 외자유치에도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은행권은 구조조정에 걸림돌이 되는 물리적 장애물은 모두 제거했다. 정부의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을 통해 부실을 털어낸데 이어 군살마저 제거함으로써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위한 기반은 마련한 셈이다. 부실은행 퇴출부터 시작된 은행수술작업이 마무리 되고 본격적인 치유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현대자동차 노사문제 대처에 실기(失機)하고 정치권이 협상과정에 과도하게 개입해 상처를 입었던 정부도 이번 협상타결로 위상을 회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헌재(李憲宰)금감위원장이 28일 노조집행부가 농성중인 명동성당을 찾아 협상을 독려해 대화의 물꼬를 여는 한편 노동부 등 다른 부처는 엄정한 법집행을 강조, 법률적 테두리내에서의 객관적인 중재자로서의 입지를 마련했다. 향후 노사관계대처에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또 은행인력정리를 주도적으로 마무리한 정부의 입장강화로 재벌개혁 등에도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금감위 당국자는 『금융부문은 가시적으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금융구조조정의 기반을 닦음에 따라 은행을 통한 재벌개혁에도 힘이 붙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지급한 댓가도 적지않다.
국민의 세금으로 살려준 부실은행 근로자들에게 9~12개월치의 퇴직위로금을 지급하는게 부당하다는 지적이 많다. 퇴직위로금중 3개월치는 법에 정해진 해고수당이고 3개월치는 남아있는 동료들이 십시일반 낸 돈으로 실제 은행에서 추가로 부담하는 금액은 3~5개월치에 지나지 않는다. 직장을 잃고 사회보장제도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때문에 은행원들은 한푼이라도 위로금을 더 받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제조업체 근로자들은 체불임금에 허덕이고 있는 상황때문에 형평성시비가 일고 있다. 형평성제고를 위해서는 사회안전망을 확충해 모든 실직근로자들에게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응집력이 부족하고 온건한 것으로 알려진 은행원들이 감원반대를 위한 명동성당집회에 2만여명이나 참여해 철야농성을 벌인 점도 반성할 대목이다. 정부가 좀더 치밀한 실업대책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실업자들의 불만이 예기치 못한 곳에서도 터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노사협상과정에서 은행경영의 자율성이 더 큰 폭으로 훼손됐다는 점도 문제다. 은행장들은 노사협상과정에서 인력감축비율을 35%, 34%, 33.3%, 33%로 순차적으로 협상안을 제시했는데 당국의 지시를 받아가면서 협상안을 내놓았다는 후문이다. 은행들은 자율협상을 보장한다는 李위원장의 발언이 있었는데도 구체적인 지시가 없다며 협상에 들어가지 못하다 뒤늦게야 협상에 참여했다. 29일오전 최종 협상에서는 인력감축비율이 다시 32%로 낮아졌다. 관치에 오래 물들어 온 은행경영진의 자율경영에 대한 의지도 부족하고 당국도 눈앞의 정책목표에 치중 자율경영을 보장한다는 철학이 자주 흔들린다는 지적이다. 금융계는 대규모 증자참여로 정부의 영향력이 강해진 가운데 비슷한 사례가 반복될 경우 자율경영은 물건너 가고 자칫 관치금융으로 회귀해 은행구조조정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게 될까 우려하고 있다.
이번 합의는 은행자율경영을 보장해야 한다는 과제외에 정부에 공공부문의 개혁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겨줬다. 은행노조는 그동안 공공부문의 미흡한 구조조정을 감원반대이유로 내걸어 왔다. 공공부문이 솔선수범하고 민간이 이를 따르도록 해야 하는데 공공부문은 개혁이 미진한 가운데 민간부문이 자기살을 짜르는 개혁에 앞장선 셈이기 때문이다.【최창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