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뉴턴&金

만유인력을 발견한 근대 자연과학의 아버지 뉴턴(Isaac Newton)은 후반부 삶을 어떻게 지냈을까. 미적분과 역학 계산에 매달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40대 중반 이후 뉴턴을 지배한 것은 화폐경제학이다. 재무부 차관격인 조폐국장도 지냈다. 1642년 12월25일, 영국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뉴턴의 학문적 업적은 일찍부터 빛났다. 24세에 미적분법 체계를 세우고 28세에 뉴턴식 망원경을 만들었다. 29세엔 모교인 케임브리지 정교수, 30세에 왕립아카데미 회원으로 추천됐다. 역저 ‘프린키피아’를 펴낸 게 45세때인 1687년. 과학자로서 정점이다. 1688년 명예혁명 직후 대학대표로 의회에 입성한 이래 뉴턴은 과학 일변도의 생활에서 벗어난다. 사교계에 발을 들여 공직을 얻으려 애쓰고 다녔다. 주로 교제한 사람은 존 로크. 영국 경험론의 대표적 철학자로 화폐개혁에도 깊이 간여한 인물이다. 재무장관 찰스 몬태규와도 사귀었다. 뉴턴이 학수고대하던 공직에 오른 것은 1696년. 몬태규의 추천으로 연봉 600파운드의 조폐국 감독관을 맡아 하루 16시간씩 일하며 경제학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1699년 조폐국장으로 승진해 25년간 자리를 지키며 주화제조 과정을 연구해 생산량을 늘렸다. 금화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오려내 금을 모으는 행위가 불가능하도록 합금 주화도 찍어냈다. 1717년 발표한 ‘금과 은의 가치와 교환비율에 대한 보고서’는 화폐경제사의 명작으로 꼽힌다. 수요과 공급의 법칙을 적용해 경제를 예측한 역사상 최초의 공무원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떨어지는 사과에서 영감을 얻은 젊은 과학자와 금(金)에 몰두한 중년의 사내. 그는 뉴턴이라는 동일인이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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