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배움이 행복이다-박형준 국회 사무총장


공자의 논어 20편 가운데 첫 편이 '배움' 편이다. 첫 경구가 '배우고 또 때에 따라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이다. 삶의 으뜸가는 덕목이 배움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배움은 글을 읽는 좁은 의미의 공부로 한정하지 않는다. 수리와 인문을 배우는 것은 물론 말타기·활쏘기와 같은 신체를 단련하는 일, 음악과 서예를 익히는 일이 모두 포함된다. 공자는 인생의 본질을 배움을 통한 자아실현에 뒀다. 공자의 행복론은 곧 배움론이다. 학습이 행복인 것이다.

이 시대야말로 배움이 행복이라는 정의가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시대다. 연구에 따르면 70대 이상 노인 가운데 무엇 하나라도 배우는 노인이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행복감이 높다. 이제 배움을 학교에서만 찾던 시대는 끝났다. 인생의 전 연령대에 걸쳐 삶의 핵심 가치이자 수단으로 배움이 자리 잡아야 한다. 이것이 평생학습사회의 의미이다.


삶의 모든 계기와 장면에서 필요한 배움은 두 차원이 있다. 하나는 합리적·실용적 차원이다. 학교 교육이 그 중심에 있다. 직업훈련도 여기에 속한다. 직장과 비즈니스 등 경쟁 사회에서 사회적 성취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실용적 차원의 배움에 매진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와 사회는 그 덕분으로 필요한 인적 자원을 얻는다. 대한민국처럼 사람 밖에 기댈 게 없는 나라는 특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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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심미적 차원이다. 사람은 삶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가꾸기 위해 배운다. 일단은 자기 몸이 이런 배움의 장소이다. 단전호흡이나 요가를 통해 몸과 마음을 바꾼다. 피트니스로 몸을 가꾼다. 색소폰 등 악기를 배워 음악적 소양을 키운다. 미술 공부를 통해 심미안을 높일 수도 있다. 인문학 강좌로 마음의 양식을 채울 수도 있다. 이 모든 일들이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로 연결된다. 삶의 행복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이런 배움의 가치가 어찌 실용적 차원보다 낮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돈 들이지 않고 이런 배움의 기회를 언제 어디서든지 가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사회의 조건이 어디 있겠는가.

국민 행복시대를 원하는가. 그러면 '배우고 또 때에 따라 익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국가의 중심 비전으로 세우라. 길게 봐 사람 키우는 일, 사람 되게 하는 일에 투자하는 것보다 더 남는 일은 없다. 선거공약 지킨다고 돈을 쏟아 붓는 '몰빵 복지'를 조정만 하더라도 재원은 마련할 수 있다.

주민자치센터·복지센터·문화센터·체육센터, 각종 연수원, 그리고 대학 등을 모두 평생 배움의 인프라로 활용해야 한다. 이 모든 곳을 유익하고 수준 높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배움의 터전'으로 육성해야 한다. 특히 차고 넘치는 지역 대학들이 '지역 공동체 대학'으로 거듭나도록 평생학습의 산실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비전과 전략이 있어야 한다. 평생학습사회 전략이 교육 정책의 덤 정도로 취급되는 지금 체계, 지금의 투자 수준으로는 어림없다. 여러 부처의 융합 정책으로 이 사안을 다뤄야 한다. 이 시대의 삶과 배움에 대한 깊은 성찰, 그에 입각한 확고한 철학 없이는 이 일을 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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