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기업들에 '카드 돌려막기식' 동결 압박…'일시 급등' 부메랑 우려

[시장주의 외면하는 물가대책]<br>업계 출혈 한계 직면…식료품값등 인상 예고<br>기름값 할인도 "3개월짜리 약속 어음" 비판<br>"통화정책으로 장기적 인플레 조정 필요" 지적




정유업계 1위 SK이노베이션이 지난 3일 기름값을 3개월 동안 리터당 100원씩 내리기로 발표하자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가격을 내린 결정을 높이 평가한다"고 즉각 환영의 뜻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3개월 뒤 기름값은 어찌 될까. 정부 관계자의 공식 답변은 "정부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업계가 '자율적으로' 가격을 내린 만큼 그때 가서 가격을 다시 올려 받아도 정부로서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이번 석유시장 활성화 대책과 맞물린 정유사의 100원 할인책은 정부의 물가대책이 얼마나 시장주의를 외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정부는 연초부터 주요 식품업계와 대형 마트를 대상으로 가격인상 자제를 촉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가공식품 전반으로 확산될 물가인상 도미노 현상이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식 물가대책으로 민간업체들은 원자재 가격인상으로 멍이 든 채 이윤출혈을 감내하고 있다. 소비자물가상승률에 집착한 정부의 물가대책이 시장을 갈수록 왜곡시키고 있다. ◇시장주의 외면하는 물가대책=지난해 하반기부터 불거진 국제 원자재가격 상승으로 올 초 물가상승 압력이 거세지자 정부는 업체들을 대상으로 가격인상 자제 촉구에 나섰다. 지경부는 2월 대형마트 관계자들을 불러놓고 물가관리 정책을 설명하면서 공정거래위원회 담합조사, 국세청 세무조사를 언급하며 기업들을 압박했다. 서울우유는 같은 시기 원가상승 압박에 우유 값을 평균 50% 인상하려다 불과 4시간 만에 가격인상 방침을 철회하면서 정부의 압력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왔다. '카드 돌려막기'식 물가동결 압박은 불과 3개월도 못 간 채 2ㆍ4분기 들어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5일 해태제과가 '홈런볼' '맛동산' 등 자사 과자류 24종의 가격을 평균 8% 올리겠다고 밝힌 것은 신호탄이다. 식자재 값 상승에도 가격인상을 자제했던 일부 케이터링 업체는 한 끼당 가격을 500~1,000원 인상할 물밑 작업을 벌이고 있다. 올 들어 밀가루ㆍ설탕 값 인상분을 판매가에 반영하지 못한 주요 제과ㆍ제빵 업체들 역시 "가격인상 요인이 있다"며 인상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한 중견 식품업계 관계자는 "직접적 압력이 없었다고 해도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마진율을 낮춘 측면이 없지 않다"고 토로했다. 최 장관이 직접 "가격인하 결정을 높이 평가한다"고 환영한 리터당 100원 기름값 인하 조치도 3개월 뒤 부메랑으로 돌아올 공산이 크다. 지난해부터 계속된 국제유가 상승세가 3개월 새 꺾이리라 예상하는 전문가는 아무도 없다. 현재 평균 2,000원에 육박하는 리터당 휘발유가격을 1,900원으로 내렸지만 3개월 뒤에는 그간의 국제유가 움직임이 반영돼 판매 값이 다시 오를 공산이 크다. 문제는 3개월 뒤 주요 정유사들이 이번에 깎은 100원을 다시 올려야 하는데 이렇게 될 경우 석유값은 일시에 폭등할 가능성이 높다. 일각에서 이번 100원 할인대책을 두고 '부도가 예정된 3개월짜리 약속어음'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물가지수에 집착하는 대책이 화 불러"=정부도 이 같은 물가대책의 맹점을 잘 안다. 그럼에도 왜 이런 무리수를 둘까. 가장 큰 이유는 단기간에 숫자로 결과물을 보여주려는 욕심 때문이다. 임종룡 기획재정부 1차관은 최근 물가대책회의에서 "농축수산물 가격이 안정되면 4월부터 물가상승 속도가 둔화될 것"이라며 "하반기가 돼야 3%대 중반 밑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농축수산물 가격지표인 신선식품지수가 지난해 3월까지 한자릿수대 상승률을 보이다 4월 12.1%를 시작으로 가격 폭등현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지난해 8월까지 2.6%를 유지했다가 9월 이후 3%대로 뛰었다. 물가상승률은 보통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한다. 즉 큰 이변이 없는 한 신선식품물가는 4월부터, 소비자물가는 하반기부터 자연스럽게 안정 기조를 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정부도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문제는 상승률이 안정세로 돌아서도 이미 물가의 절대수준이 워낙 높아졌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체감물가는 여전히 견디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억눌렀던 가공식품ㆍ석유 가격이 하반기에 한꺼번에 분출될 경우 물가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질 수 있다. 여기에 물가 최후의 보루인 공공요금까지 일부 들썩일 경우 정부의 낙관적 전망은 어긋날 수 있다. 조동철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정부부처가 동원돼 일부 품목 가격을 조정하는 방식은 결코 근본적인 물가대책이 될 수 없다"며 "당장의 물가상승을 인정하고 통화정책으로 장기적 인플레이션 조정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