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시장안정펀드가 금융시장 안정이라는 본래의 설립취지와 달리 채권매입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그림의 떡’이 아니냐는 원성을 사고 있다. 금융당국에서는 위기 속의 신용시장을 구원할 ‘구세주’로 내놓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본 결과 시장의 기대와는 영 딴판이라는 지적이다. ◇채안펀드 출발부터 삐거덕=채안펀드가 출발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기업들의 자금난을 덜어주고 신용경색을 완화하기 위해 서둘러 증액을 추진하는 것도 시원찮을 판에 이미 조성된 자금으로도 채권매입을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채안펀드가 출범한 시기는 지난해 12월17일. 당초 10조원 조성 목표에서 1차로 5조원을 모아 본격적인 운용에 들어간 지 20여일이 지났지만 채권매입 규모는 고작 5,000억원에 머물렀다. 이는 지난 1999년 대우채 사태 당시 채권시장안정기금이 첫 납입액(2조5,000억원)으로 운용을 시작한 지 일주일여 만에 1차로 10조원이 조성됐고 열흘 뒤 20조원으로 증액되는 등 한달여 만에 한도까지 채권매입이 마무리됐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지지부진하다는 평가다. 채안펀드 운용이 시장의 예상과 달리 소극적인 것은 출자 금융기관이 손실위험을 극도로 꺼리는데다 운용사들도 명성에 흠이 갈 것을 우려해 안전채권만 선호하기 때문이다. 산은자산운용의 한 관계자는 “펀드 만기가 3년인데 그동안 등급이 낮은 업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안전한 채권을 선호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매입 가이드라인을 완화하려고 해도 수많은 출자기관의 이해관계가 걸려 손대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안전채권만 찾다 보니 시장에서 원하는 물건을 구하기 어려워 운용이 더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채안펀드는 ‘그림의 떡(?)’=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금시장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만 심화되고 있다. 신용등급이 좋은 업체는 유동성도 괜찮은데 오히려 자금이 몰려들고 정작 등급이 낮은 곳은 돈을 구하려고 해도 손 내미는 곳이 없는 형국이다. 이 때문에 채안펀드에 크게 기대하고 있는 기업들만 속이 타들어가고 있다. 모 중견기업 관계자는 “자금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채안펀드가 회사채를 사줄 날만 기다리고 있다”며 “하지만 운용한 지 한참 지나도 별 소식이 들리지 않아 속만 끓고 있다”고 푸념했다. 신용등급 A인 모 카드회사 자금 담당자는 “채안펀드가 AA- 등급의 카드채만 취급하고 그 나머지는 나 몰라라 하고 있다”며 “신용등급이 낮은 업체 입장에서 채안펀드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고 한탄했다. 반면 운용사 입장에서도 시장에 혼선이 생기는 등 애로사항이 많다고 지적한다. 산은자산운용 관계자는 “잘못은 본인들이 해놓고 책임을 채안펀드에만 지우는 모럴해저드 업체들이 상당히 많다”며 “특히 카드ㆍ할부사의 경우 채안펀드를 믿고 기업어음(CP) 발행을 아예 중단하고 회사채 발행만 나서는 등 자금시장이 바이어마켓에서 셀러마켓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정책적 ‘메스’ 시급= 시장에서는 채안펀드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며 금융당국이 적극 나서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모 건설업체 관계자는 “안전한 채권만 사주려면 도대체 왜 채안펀드를 만들었냐”며 “신용등급이 다소 낮은 채권도 편입하는 등 선택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자금난에 시달리는 모 기업체 관계자는 “등급이 낮은 업체의 채권에 신용보강을 요구하는데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며 “금융당국이 나서서 당초 취지대로 채안펀드의 운용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채안펀드에 50%의 유동성을 공급하기로 한 한국은행도 불만이 가득하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이런 상황이면 원래 1차 목표였던 10조원 조성도 어느 세월에 될지 불투명하다”며 “2차ㆍ3차 증액은커녕 은행권 자본확충펀드 구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게 뻔하다”고 밝혔다. 실제 산은자산운용 관계자는 “2차 자금 증액을 위해서는 1차로 조성된 5조원의 자금이 소진돼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3월 이후나 가능할 것 같다”며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는 뜻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