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하게 계산된 전략인가, 위기감에 따른 우발적인 도발인가.' 애플의 특허 분쟁을 바라보는 글로벌 정보기술(IT) 업계의 시선은 엇갈린다. 시장 주도권 선점을 위한 의도적인 전략이라는 관측이 있는가 하면 후발업체의 부상을 견제하고 향후 주도권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우발적인 도발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애플이 특허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경쟁업체의 특허 경쟁력도 상당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분명한 것은 애플이 당분간 특허 분쟁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주요 대상은 애플의 최대 경쟁자로 부상한 삼성전자다. '아이폰 쇼크'로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고배를 마셨던 삼성전자는 애플의 잇따른 특허 공세에 '정면 대응'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자칫 '스마트 시대'의 주도권을 애플에 내줄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꼬리를 무는 애플발 특허 소송=애플은 올 7월 초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삼성전자의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미국 수입을 금지해달라며 제소를 요청했다. 삼성전자가 지난 6월 말 애플을 ITC에 제소하자 즉각 맞제소에 나선 것이다. 양사가 미국과 한국 등에서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는 것과 별개로 이제는 무역분쟁으로 사안이 확대된 것이다. ITC는 미국 대통령 직속 준사법 독립기관으로 주로 특허침해 등 국제적인 통상분쟁을 다룬다. 조사 결과에 따라 해당 제품의 관세율을 인상하거나 과징금을 부과하며 사안에 따라서는 수입제한 등의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 수개월이 소요되기 때문에 빨라야 내년 말에나 결론이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양사의 특허 공방은 올 4월 애플이 미국 캘리포니아 법원에 특허침해를 이유로 삼성전자를 제소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삼성전자를 겨냥한 애플의 특허 공세는 일종의 도박"이라며 "오히려 소송 자체가 삼성전자의 기술력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애플은 이후에도 한국ㆍ일본ㆍ독일 등에 잇따라 특허 소송을 제기했고 삼성전자도 맞소송에 나서면서 양사의 특허 분쟁은 글로벌 무대로 확산됐다. 정동준 수특허법률사무소 변리사는 "애플이 삼성전자의 통신 관련 특허 피해 제품을 만드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소송이 전면전으로 진행되기보다는 양사의 전략적 판단이나 역학 관계에 따라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애플은 특허 공세로 뭘 노리나=애플은 미국 법원에 제출한 소장에서 "수많은 경쟁사가 애플을 따라하고 있지만 삼성전자가 가장 정도가 심하다"고 비난했다. 삼성전자가 애플의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모방한 제품을 판매해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박태영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과거 글로벌 IT업체의 특허소송을 들여다보면 디자인에 대한 소송은 많지 않았고 기술과 관련한 소송은 합의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 때문에 결과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애플의 특허 공세는 최대 라이벌로 부상한 삼성전자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가장 크다. 애플과 삼성전자는 지난해까지 상당한 격차를 보였지만 올 들어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직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애플은 올 2∙4분기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2,030만대의 아이폰을 판매해 사상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 삼성전자는 같은 기간 2,020만대의 스마트폰을 팔아 치우며 애플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삼성전자는 이번달 미국 시장에 전략 스마트폰 갤럭시S2를 선보일 계획이어서 올 3∙4분기에는 스마트폰 시장 1위 등극이 유력하다. 애플이 삼성전자를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나서는 데는 삼성전자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의도도 있다. 애플은 올 1∙4분기 삼성전자에서 2조1,450억원어치의 반도체와 액정화면(LCD) 패널을 구입해 소니를 제치고 삼성전자의 최대 고객으로 올라섰다. 삼성전자 매출액에서 애플이 차지하는 비중도 5.8%에 달했다. 애플과 삼성전자는 최대 경쟁자인 동시에 최고의 협력사인 셈이다. 최성제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번 소송은 특허 분쟁이라기보다는 공급선 다변화를 위한애플의 치밀한 전략"이라며 "삼성전자로부터 부품의 상당수를 공급 받는 애플이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수순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특허는 양보다 질, 전략 특허에 주력해야=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최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금 당장 소프트웨어∙디자인와 같은 '소프트 기술'과 특허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필요한 기술은 악착같이 배워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글로벌 IT 시장의 주도권 경쟁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이동하고 있어 경쟁력 확보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007년부터 미국 특허 등록 순위 2위를 달리고 있다. 지난해에만 4,551건의 특허를 미국에 등록했다. 통신 분야 특허 5,933건을 포함하면 지금까지 미국에 등록한 특허는 28,700건에 달한다. 올 초에는 미국 최대 특허 보유업체인 IBM과 '교차 특허(크로스 라이선스)' 협력을 체결하고 특허 공유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양에서 글로벌 수준에 도달했지만 특허의 수준과 질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지적된다. 이종근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한국 기업은 특허 등록 건수는 많지만 대부분이 하드웨어 영역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며 "사용자환경(UI) 특허의 경우 애플은 400여개를 보유하고 있지만 국내 업체는 10여개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특허 경쟁에 대비하려면 소프트웨어 관련 인력을 육성하고 특허 분쟁에 대한 전략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스마트폰 시대가 가속화될수록 소프트웨어와 특허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김진석 서울시립대 컴퓨터학부 교수는 "국내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새로운 특허와 디자인이 나오면 상용화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것이 너무 많다"며 "아무리 좋은 특허라도 기업이 채택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에 정부 차원의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