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경기부양을 위해 오는 22일 통화정책회의에서 회원국의 채권을 매입하는 양적완화(QE)를 선언할 예정이라고 주요 외신들이 일제히 전했다. 채권 매입은 ECB가 직접 하지 않고 각 회원국 중앙은행들이 수행하는 것이 유력시된다.
이 같은 절충안은 QE 추진을 위해 배수진을 쳐온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반대 목소리를 내온 독일을 설득하기 위해 던지는 승부수로 풀이된다.
17일(현지시간) 독일 주간지 슈피겔에 따르면 ECB는 각 회원국 중앙은행들이 국가부채 총액의 20~25%선에서 자국 국채를 스스로 매입하도록 하는 내용의 QE 방안을 유력하게 고려하고 있다. 드라기 총재는 지난 14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만나 이 같은 내용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ECB가 직접 회원국 채권을 사들이는 방식도 저울질됐으나 이는 자칫 재정 불량 국가의 신용불안을 재정 우량국에 떠안기는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는 논란을 사왔다. 따라서 드라기 총재는 각국 중앙은행들이 자국의 재정위험을 책임지는 차선책을 일종의 절충 카드로 던졌다는 게 금융권의 해석이다. 이렇게 하면 재정 불량국의 도덕적 해이를 질타해온 독일을 회유할 명분이 마련될 수 있다.
QE 규모는 5,000억~1조유로가 유력시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도 "ECB가 이번주 회의에서 최소 5,000억유로(약 626조7,800억원) 상당의 QE 프로그램을 제시할 예정"이라며 "다만 채권 매입국들이 다른 나라 부채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손실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형태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물론 대규모 QE가 실제로 가라앉는 유럽 경제를 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중앙은행들이 국채를 대규모 매입하면 시중금리가 하락해 기업과 가계의 이자 부담을 줄여주고 자금조달을 용이하게 해주는 순기능이 있지만 저금리의 시중자금이 산업투자 등 실물경제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 유동성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위스중앙은행이 최근 자국 통화(스위스프랑)에 대한 최저환율제를 깜짝 폐지하면서 환율방어를 위한 유럽 채권 매입 여력을 낮춘 것도 QE를 통한 유로존 국채 매입 정책효과를 희석시키는 악재로 부상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국가 단위의 채권 매입은 유로존의 통합을 손상시킴으로써 통화정책의 개별 국가화 경향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기 총재가 승부수를 거는 것은 그나마 QE 말고는 다른 경기부양 방안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유럽 경제는 지난해 11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대비 0.2% 하락해 5년 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에 진입하면서 디플레이션 공포에 빠져 있다. 이런 와중에 QE마저 불발된다면 드라기 총재가 올해 상반기 중 퇴임할 수도 있다는 게 외신들의 진단이다. JP모건은 "(드라기의 방안은) ECB의 재정건전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투자자들을 (국채 외에) 다른 자산들로 이끄는 효과를 줄 것"이라며 "유로화 약세와 함께 경제성장률 및 기대인플레이션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ECB가 이번 2월 정책회의에서는 QE 선언만 하고 실재 국채 매입은 3월부터 단행할 수 있다.
한편 ECB의 QE 도입이 임박해지면서 독일·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벨기에·핀란드·오스트리아의 10년물 국채 수익률이 16일 일제히 사상 최저치까지 떨어졌다. 반면 같은 날 유로화는 장중 1.1459달러까지 떨어져 2003년 9월 이후 11년여 만에 처음으로 1.150달러선이 무너졌다. 캐시 리엔 BK자산운용 외환담당 스트래티지스트는 "ECB의 QE가 현실화되면 유로화는 조만간 1.10달러선까지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