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기자의 눈] 지구촌 도청 공포

전세계가 도청 파문으로 떠들썩하다. 안기부의 불법 도청 ‘X파일’ 파문이 한국을 휩쓸고 간 가운데 미국과 이탈리아에서도 도청 스캔들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다. 미국에서는 조지 부시 행정부의 비밀 도청이 연말 워싱턴 정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번 파문은 부시 대통령이 9ㆍ11테러 이후 영장 없이 자국민들의 전화를 도청하고 e메일을 추적하도록 승인했다는 뉴욕타임스의 폭로가 도화선이 됐다. 논란은 즉각 ‘안보’ 대 ‘인권’의 문제로 확대됐고 부시 대통령은 뉴욕타임스의 폭로가 국가 안보를 훼손했다며 역공에 나섰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며 미국 사회의 절대선으로 자리잡은 안보 논리가 이번에는 다소 밀리는 모습이다. 미 상원은 비밀도청 사실이 폭로된 후 정보기관의 정보수집 기능강화를 골자로 하는 애국법의 시효연장을 거부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도청 스캔들로 종신직인 중앙은행 총재가 사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탈리아 검찰은 은행간 인수 경쟁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아온 안토니오 파지오 중앙은행 총재의 차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혐의 사실을 입증할 도청 문건을 언론에 흘렸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앞세워 사퇴 여론을 일축하던 파지오 총재는 결국 총재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사회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도청이 필요악이라는 주장도 있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도청이 꼭 필요하다는 입장이고 이탈리아 검찰도 도청을 통해 경제계 거물의 비리를 파헤치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과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이 작지 않다. 미국에서는 일반 국민의 통화 내용까지 도청됐음이 밝혀졌고 이탈리아에서는 사건 관련 인사들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이 언론에 여과 없이 보도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절차를 무시한 도청은 ‘독이 든 사과’와 다르지 않다. 상황에 따라 도청의 필요성을 일부 인정한다고 해도 도청으로 알아낸 사실이 무차별적으로 공표되는 것은 국민의 알권리 차원을 떠나 개인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 정보화의 물결 속에 도청과 인권의 충돌은 점차 피할 수 없는 지구촌의 과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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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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