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속되는 국제유가 하락과 공급과잉이 국제 지정학적 역학관계를 바꿔놓고 있다.
주요2개국(G2)인 미국과 중국은 저유가 시대의 최대 승자로 꼽힌다. 미국은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이란에 대해 보다 강경하게 대응할 수 있고 나아가 중동에 쏟던 에너지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돌릴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에너지의 60%를 수입하는 중국도 싼값에 석유를 비축할 수 있게 됐고 동맹국이자 경쟁국인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우위에 설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반면 지난 수십년간 카르텔을 형성하며 세계 경제를 흔들었던 중동 국가들의 파워는 크게 떨어졌으며 에너지를 무기로 서방에 맞서온 러시아는 곤경에 처했다.
블룸버그는 20일(현지시간) 미국이 저유가와 자국 내 원유생산 증가에 힘입어 중동 산유국들을 정치외교적으로 압박할 수 있게 됐다는 점 등을 들어 "새로운 저유가 시대가 시작됐고 이로 인해 몇몇 지정학적 관계가 변곡점을 맞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미 지역에서 본격화한 셰일오일(셰일가스) 개발 붐으로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 지위를 넘볼 수준에 이르렀다. 미국이 셰일유전 등에서 퍼올린 막대한 원유물량을 시장에 쏟아내며 유가 폭락을 주도하자 이제는 중동 산유국 카르텔이 무너질 지경이다. 그 여파는 석유수출로 경제를 지탱해온 남미 산유국들과 러시아에까지 미치며 해당국들의 정치·경제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미국발 '역오일 쇼크'가 국제 정치무대의 질서까지 뒤흔드는 셈이다.
중국 역시 미국 덕에 저유가의 수혜를 톡톡히 보고 있다. 중국은 지난 2006년부터 전략비축유를 공격적으로 늘려왔는데 근래의 '석유 바겐세일'은 그야말로 호재 중의 호재일 수밖에 없다. 현재 중국의 전략비축유 규모는 1억6,000만배럴 안팎 수준으로 추정되는데 중국은 이를 오는 2020년까지 5억배럴 수준으로 늘려야 한다. 특히 중국은 러시아와의 관계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게 됐다고 블룸버그는 분석했다. 최근 중국이 러시아와 30년간 4,000억달러 규모의 가스 공급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도 저유가 덕이라는 지적이다. 중국 쉬안먼대의 린 보치앙 교수는 "유가가 낮은 수준을 유지하는 한 중국은 러시아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며 "러시아는 에너지 수출을 통한 수입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라고 말했다.
반면 러시아, 중동 및 남미 산유국 등은 울상이다. 당장 산유국 카르텔이 중심이었던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내분 직전에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번 기회에 유가를 더 내려 경쟁자인 미국 셰일오일 업자들을 무너뜨리겠다는 작전을 펴고 있다. 반면 유가 하락에 따른 재정수입 급감으로 위기에 직면한 베네수엘라 정부 등은 OPEC 회원국들에 감산을 요청하면서 유가 하락 저지를 주창하고 있다. 중동의 맹주를 꿈꾸던 이란도 석유수출을 통한 수입이 30%나 줄어들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다. 또 이는 서방국들과의 핵협상에서도 이란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러시아의 사정은 한층 어렵다. 블룸버그는 "러시아가 (저유가 시대의) 최대 패배자"라고 진단했다. 가뜩이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서방권의 경제봉쇄로 통화가치 폭락 등의 어려움를 맞은 가운데 주된 수입원인 유가마저 떨어지면서 경제난이 가중됐기 때문이다.
한편 원자재 투자 전문기관인 티로이프라이스의 숀 드리스콜 매니저는 최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현재) 원자재 가격들은 하강 사이클의 첫해에 진입해 있다고 생각한다"며 원자재 가격 하락세가 매우 장기간 진행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