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R의 공포를 넘어라] <2부> 글로벌 위기 현장을 가다 ⑥ 독일

남유럽 불길 번질라… 강소기업 앞세워 방어벽 쌓기 총력<br>사태진화 맏형 역할 불구 수출 의존도 너무 높고<br>위기국에 물린 돈 많아 제조업 등 흔들릴 조짐<br>유로존 해체 땐 타격 커… 1인 창업 등 적극 지원

지난 7월24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번화가인 알렉산더 광장 앞이 현지 주민들과 휴가를 즐기는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유로존 살리기라는 막중한 과제를 떠안고 있는 독일경제는 최근 몇몇 지표가 악화하는 등 다소 흔들리는 조짐이 있지만 활기에 찬 베를린 시내의 모습은 아직 위기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베를린=서일범기자


지난 7월24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포츠다머 광장 인근에 위치한 독일 중소기업협회(BVMW)에서는 유럽 각국에서 모여든 30여명의 경제학자와 은행가ㆍ기업인ㆍ기자들 간에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맞댄 이들의 관심사는 하나,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이 나아갈 방향을 찾는 일이었다.

그리스 위기해법으로 일명 'G유로(유로화도 드라크마화도 아닌 제3의 화폐)' 도입을 제안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토마스 마이어 도이체방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날 "그리스에 일시적으로 환율을 조절할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해줘야 유로존 붕괴를 막을 수 있다"고 거듭 주장했다. 트론 안데르센 노르웨이 과학기술대 교수는 유동성을 공급하면서도 물가급등을 막기 위해 전자화폐를 도입ㆍ지급하자는 다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울리히 브라체 브란덴부르크전문대 경제학 교수는 "국가와 국가, 국가와 기업 간 불신의 벽을 허무는 것만이 유로존 위기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콘퍼런스에서 유로존 해체를 주장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들은 유로존이 깨질 경우 경제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유로화를 사용하는 덕에 수출시장에서 현금을 쓸어 담은 독일경제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독일이 유로존의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린다. 탄탄하다던 독일경제가 최근 흔들릴 조짐을 보이는데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내가 낸 세금으로 게으른 남유럽 사람들을 도와줘야 하는가"라는 불만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오 오호펜 BVMW 회장은 이에 대해 "우선 독일경제가 순항해야 위기극복의 리더십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로존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본 곳도 독일이고 난마처럼 얽힌 매듭을 풀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진 곳도 결국 독일밖에 없다는 얘기다.


◇독일로 번져가는 남유럽 불길=현지에서 본 독일은 아직 위기와 거리가 멀었다. 베를린 시내를 일주하는 시티투어버스에는 빈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관광객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날 브란덴부르크문에서 만난 한 미국인 관광객은 "그리스나 스페인보다 물가가 저렴하고 더 안전한 독일을 휴가지로 택했다"고 말했고 한 택시기사는 "1년 전이나 지금이나 수입에 별 차이가 없다"고 무덤덤하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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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독일이 통일 직후인 1990년대 이후 또 한번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우선 수출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에 발목이 잡힐 수 있다. 독일 국내총생산(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41%가 넘어 외부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유럽 재정위기에 더해 중국 경착륙, 미국 경기둔화 같은 악재가 한꺼번에 터질 경우 탈출구를 찾기 어려울 수 있다. 독일 기업인들의 체감 경기지수인 제조업구매자관리지수(PMI)는 3월 이후 5개월 연속 기준선인 50을 밑돌고 있다. 앞으로 경기가 위축될 것으로 보는 기업인들이 더 많다는 뜻이다.

남유럽 국가들에 물린 자금이 많다는 점도 부담이다. 스페인 은행들에 대한독익의 익스포저는 지난해 말 기준 1,130억유로(160조원)다. 2008년 최고 2,000억유로에 달하던 액수를 줄이고 줄인 게 이 정도다. 1ㆍ2위 은행인 도이체방크와 코메르츠방크는 각각 290억유로, 142억유로의 부담을 안고 있다. 잠재적 디폴트(채무불이행) 위험국가인 스페인이 끝내 전면 구제금융을 신청할 경우 막대한 부실이 독일 금융권으로 옮겨온다는 얘기다. 독일 은행들은 유럽은행감독청(EBA)이 제시한 자기자본비율 9% 기준을 충실히 지킨 것으로 평가되지만 스페인의 부실을 떠안게 되면 더 많은 자금을 자본확충에 쏟아 부어야 한다. 이 경우 독일 기업에 대한 대출이 줄어들고 연쇄적으로 기업 투자가 위축돼 결국 국내 경기를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

◇강소기업의 저력에 독일경제의 앞날 달렸다=하지만 독일경제는 침몰하는 이웃 국가와 달리 적어도 아직까지는 순항을 이어가고 있다. 마이너스 성장에 그칠 수 있다는 시장의 우려와 달리 독일의 올 2ㆍ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0.3%를 기록했다. 7월 실업률은 6.8%로 유로존 평균(11.2%)이나 스페인(24.6%) 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용시장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여러 잠재적 위험요소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이처럼 든든한 유로존의 '맏형'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일명 '히든챔피언'으로 불리는 든든한 강소기업의 위력 덕분이다.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독일의 중소기업 수는 지난해 현재 전체 기업의 99%에 달하는 400만개로 이들이 독일 총 부가가치의 53.2%인 5,532억유로를 생산하고 있다. 저변이 탄탄한 이 같은 구조 덕분에 독일은 몇몇 대기업에 의존하는 나라에 비해 위기대응 능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오호펜 회장은 "독일경제의 척추는 중소기업"이라며 "특히 고용유발 효과는 중소기업이 대기업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역설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 정부는 통일 후유증, 경직된 노동시장, 과도한 사회복지, 취약한 금융 시스템 등 지금 한국이 겪고 있거나 겪을 것으로 예상되는 문제들을 이겨내기 위해 중소기업 살리기에 사활을 걸었다. 대전환기에 접어든 우리나라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대표적인 정책이 2002년 시작한 일명 하르츠(Hartz) 개혁이다. 재계와 학계ㆍ노동계 등 15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하르츠위원회는 ▦1인 기업 창업 지원 ▦노동시장 유연화 ▦사회복지 축소 ▦법인세 인하 등의 정책을 밀어붙여 한때 9%에 육박하던 실업률을 2010년 7.1%까지 끌어내리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서일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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