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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수능이 치러진 지 1주일이 됐습니다. 올해도 예년과 비슷하게 안타까운 뉴스들이 있습니다. 시험 전날 공포를 이기다 못해 스스로 세상을 등진 학생, 1차 수시에서 명문대에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채점 결과를 비관해 투신한 학생 등 슬픈 소식은 어김없이 들려 왔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입시 지옥의 시초격인 과거 일본에서도 ‘대입 자살’이 빈번했습니다. 20세기 초엽 일본 도쿄의 명문고인 제일고(第一高) 학생이 하코네의 폭포에서 투신자살 해 사회에 충격을 안겨준 적이 있습니다. 반에서도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 학생은 절벽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그 안에 ‘인생은 불가해(不可解)’라는 쪽지를 남겨 놓고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당시 쇼펜하우어나 니체와 같은 염세주의 철학에 푹 빠져 있던 일본 고교생들이 입시 스트레스에 못 이겨 모방자살을 하는 사례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성적이 뭐라고, 안타깝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자살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묶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선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견디지 못해 숨을 끊는 경우입니다. 최근 28세 여성의 사망으로 미국에서 문제시된 바 있는 안락사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죽음으로부터 잠재적인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치료와 관심, 그리고 상담이 유일한 처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유형은 도대체 답이 없다고들 이야기합니다. 바로 ‘명예 자살’입니다. 순수한 자기 동기에서 비롯된 죽음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원인에 의해 선택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명예 자살은 산 자들의 가슴에 멍이 들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합니다. ‘내가 받은 참혹한 고통을 너희들도 영원히 느껴 보라’는 심리가 깔려 있다는 것이죠. 행여나 조직 내에서의 갈등이나 이해관계로 인한 죽음이라면 상대방은 무한한 책임과 부담을 느끼게 될 겁니다.
어쩌면 입시 스트레스로 인한 학생들의 죽음은 명예자살이 아닐까요? 지금껏 우리는 아이들이 치열한 입시 경쟁으로 인해 느꼈던 소외감, 점수의 무자비함을 감성적으로 이야기하는 데 그쳐 왔습니다. 시험 문제에 오류가 있다며 사과를 하는 경우는 있어도 자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논의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응시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최소한의 생존권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현행 체제가 지나치게 평면적이어서 정신적으로 심약한 아이들을 구제할 수 없다면, 응당 이들을 지킬 수 있는 제도적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정부 당국자들은 ‘사정은 안타깝지만 대책이 없다 ’ ‘개인의 문제에 가까운 것이라 정책적 대응이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 해 왔습니다.
물론 수능과 입시 자체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민감한 현안을 안고 있는 과제입니다. 국민들이 이 시험에 대해 ‘공정성(fairness)’ 프레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구 하나를 구하기 위해 새로운 전형을 신설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교육학자들은 EBS 교재를 반영하기에 급급하고 가시적인 성과 지표 이외의 검증 기준이 고민되지 않은 입시는 잠재적인 우울증 환자를 낳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오죽하면 교육학과 교수가 “너희가 고등학교에서 단련 받은 지식은 정당하지 못한 과정으로 주입된 것”이라고 말했을까요. 우리의 입시제도 자체가 누군가의 소외와 슬픔이라는 토대 위에 선 것만큼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현행 체제를 완전히 부인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과중한 공부 부담을 완화하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육이 만인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고 일종의 사다리 기능을 하는 장치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정상적인 상태로 시험을 볼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한 조치가 공론화될 필요는 있습니다. 전통적인 제도 안에서는 생산적인 논의가 어려운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미 교육이 충분히 정치적인 현안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매년 점수 하나 때문에 고귀한 목숨을 버리는 실태에 노출된 아이들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정치권과 관계자들이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껏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쌓여 왔던 자살 사건들이 행여나 우리에게 던지는 ’명예 자살‘의 메시지는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회에는 해마다 의원입법에 의한 제정안과 정부 입법안들이 쌓인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두 가지 쯤은 입시를 앞두고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반영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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