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매혹적 변형 대지 생명력 연출권영우展 27일까지...가나아트센터서
전통은 예술가에게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강요된 룰이다. 상상력이라는 게 그 토양을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혁파는 과거 또는 전통과의 밀고 당기는 율동 속에서 잉태된다.
함경남도 이원에서 태어난 권영우(76) 화백은 서울대 동양화과 제1회 졸업생이다. 그러나 화가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붓이 아니고 칼이나 송곳이다. 먹은 종이 속에 숨어 들어가 있다가 화가가 응집해내는 채색의 번짐 혹은 돌출 속에 감추어진다.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오픈해 27일까지 이어지는 권영우 화백의 전시회에서는 전통적 소재인 한지가 어떻게 변형, 운영되고 있는지를 감상할 수 있다.
미술평론가 김현숙씨는 권영우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동양화라는 지필묵의 합일체를 과감하게 분열시켜서 그 중 종이라는 척박한 땅만을 일구려 하는 권영우의 반역정신 속에는 역설적이게도 농부의 충실함이 숨겨져 있다.』
지필묵이라는 완고한 형식을 깨려는 화가의 작업은 다소 이질적이면서도 무척 매혹적인 과정을 연출한다.
작가는 화선지를 겹쳐 바르고 그 위에 뚫기, 밀기, 긁기, 찢기 등의 행위 흔적을 남긴다. 이렇게 해서 그 형상이 찢겨지고, 이완되고, 뭉쳐지는 그 골격의 사이 사이에 대지의 웅혼함을 드러내는 색료가 삼투되면서 에너지의 순환을 연출한다.
말하자면 동양화의 지필묵 중에서 작가에게 유일하게 남은 종이는 뭇 생명을 잉태하는 하나의 토양으로 발전해가면서 작가의 상상력이 응집되고 번져가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지필묵이라는 한정된 도구를 갖고 일정한 룰에 충실한 구도를 연출하는 동양화를 전공했던 작가는 언제부터인가 자유와 혁파에 이끌리게 되었으며, 한지의 발묵 효과 역시 대지에 응축된 에너지처럼 하나의 생명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작가는 지난 98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올해의 작가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는 70~80년대의 작품 50여점이 출품되는데, 채색없이 한지를 뚫고 찢는 한지 변용 작업과 채색이 가해진 과슈, 묵 채색작업으로 나누어진다. 문의 (02)720-1020.
이용웅기자YYONG@SED.CO.KR
입력시간 2000/08/2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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