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잔뜩 움츠러들고 있다. 일파만파로 확산되는 검찰의 대선비자금 수사도 그렇고, 앞으로 펼쳐질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의 불똥이 어디로 튈 지 가늠하기가 쉽지않은 까닭이다. 게다가 곧 주요그룹의 총수와 최고 경영인들이 줄줄이 검찰청사에 불려가기로 예정되어 있다.
돌이켜 보면 정치권은 선거때마다 기업들에 손을 벌리며 `보험들기`를 압박했다. 물론 그중에는 충분한 반대급부를 받아낸 기업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공생 관계도 출발점은 정치권의 `요구`였다.
지금은 과거와 다르다. 이제 기업의 경영투명성은 생존의 키 워드다. 사실 정치권의 비자금요구가 기업의 분식회계로 이어지는 악순환 고리는 끊을 때가 지났다.
그러나 이 같은 개혁은 어디까지나 `보다 투명하고 생산적인 정치`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자칫 기업들만 희생양으로 만들어 정치권의 잘못을 떠넘기는 결과가 야기돼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선자금 수사의 무차별적인 확대로 수사대상 기업들 뿐만 아니라 한국 기업 전체의 경영투명성에 대한 국내외 투자자들의 신뢰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이런 염려는 벌써 부분적으로 현실화하는 조짐이다 .
이처럼 기업경영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요인들이 잇달아 불거짐에 따라 기업들은 해외 IR은 물론 내년 사업계획 수립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 자칫 대통령 재신임 문제에 이어 대선비자금, 측근비리 특검 문제로 도를 더해가고 있는 정국혼란이 내년 총선까지 이어진다면 최악의 상황이 될 게 뻔하다.
임시국회가 문을 열긴 했지만 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시장 개방에 대비한 농어민 지원 특별법, 이라크 파병동의안 , 국민연금법 개정 등 현안들은 언제나 처리될지 부지하 세월이다.
기업들은 내년 투자규모를 소폭 늘리겠다면서도 정작 투자시점은 하반기 이후로 미루고 있다.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해소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경기침체도 오래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히 투자의 적기를 놓친 한국은 회복세를 타고 있는 세계경제에서 뒤처질 우려가 높아진다.
정치란 무엇이며, 또 정치인의 임무는 무엇인가. 사회의 여러 갈등을 치유하고 새로운 동력을 이끌어내 보다 나은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잘못에 대해서는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대선비자금 문제의 처리와 관련제도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기업이 건강하게 커가도록 돕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중국은 금방 뒷덜미를 낚아챌 듯 등뒤에 바짝 붙어있는데, 미국ㆍ 일본ㆍ 독일 등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 경제의 문제는 소비와 투자의 침체에 따른 경기부진이 아니다. 생산ㆍ기술개발ㆍ금융ㆍ기업경영ㆍ노동ㆍ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구조적으로 흔들린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그나마 간신히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수출도 허점 투성이다. 품목과 지역이 편중돼 있는데다 갈수록 높아지는 핵심부품의 해외 의존도는 가히 아킬레스건(腱)이라 할만 하다.
1인당 소득 2만달러는 결과로서의 가치다. 그 자체가 목표일 수는 없다는 얘기다. 우리사회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일류국가`여야 한다. 그것을 위한 첫째 조건은 뭐니뭐니해도 튼튼한 경제다. 그리고 강한 경제는 기업들이 기업 고유의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끔 정부와 사회가 힘을 모아줄 때 비로소 가능해 진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이종환 부국장ㆍ산업부장) jwle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