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레셉스 & 수에즈운하

1894년 12월7일, 수에즈운하를 건설한 페르디낭 드 레셉스(Lesseps)가 사망한다. 가업(家業)을 이은 외교관인 그를 엔지니어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다. 수에즈운하 건설만한 인류의 대역사도 없기 때문이다. 운하는 고대부터 존재했다. BC 1380년께 부분 완성된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는 7세기까지 중요한 수로로 쓰였다. 운하를 뚫으려는 베네치아 상인들과 프랑스 루이 14세, 독일의 라이프니츠, 나폴레옹의 시도는 줄줄이 무산됐다. 레셉스가 개착권을 따낸 것은 1854년. 아버지대부터 쌓아온 인맥이 이집트와 그 종주국 오스만투르크를 움직였다. 1859년 시작된 공사는 우여곡절 끝에 1869년 완공된다. 아시아 항로가 1만여㎞나 단축됐다. 세계 물류에 혁명이 일었다. 운하 건설을 반대하던 영국이 늦게 뛰어들었다. 마침 운하 지분의 46%를 소유한 이집트 총독 이스마일 파샤가 낭비와 사치벽으로 파산직전인 상태. 매입자금은 유태인 로스차일드에서 나왔다. ‘담보는 영국정부’라는 말에 400만파운드를 내준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세르의 국유화선언(1956년)까지 81년간 해마다 수입의 5%를 챙겼다. 금융역사상 가장 짭짤한 신용대출로 꼽히는 대목이다. 운하를 얻은 영국의 패권은 더욱 단단해졌다. 프랑스는 소액주주로 내려 앉았다. 레셉스의 말로는 더 비참하다. 파나마운하건설에 뛰어들었지만 말라리아 모기의 습격과 공기지연, 경영부실이 겹쳐 1889년 파산을 맞는다. 5년 후 그는 정신착란 상태로 삶을 마감했다. 수에즈운하는 건재하다. 운하통행이 불가능할 만큼 유조선의 덩치가 커져 물동량이 다소 줄었어도 이집트는 연간 20억달러의 통행료를 챙기고 있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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