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법조이야기] 미궁에 빠진 박상은 사건

부산 S대학 3학년 박상은(朴尙恩)양은 서울 오빠집을 나간지 3일만인 81년 9월21일 오전 8시30분께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 여관의 건축자재 야적장 더미속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朴양의 몸에는 심한 타박상과 함께 치흔(齒痕)등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었다.경찰은 81년 여름방학때 朴양과 함께 미국에 어학연수를 다녀온 대학생 張모군을 살인혐의로 검거, 검찰에 구속 품신을 올렸다. 張군은 무려 16일동안 파출소와 여관·호텔 등을 전전하면서 수사를 받아 왔었다. 사건을 지휘해온 서울 동부지청 김기준(金基駿)검사는 경찰의 구속품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金검사의 이같은 결정에는 김주한(金宙漢)지청장, 김영재(金榮載)차장검사, 이홍균(李洪均)부장검사 등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었다. 당시 金지청장은 張군이 범인이 아닌것 같다는 의견을 강하게 제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金지청장은 대법관을 지내고 현재 변호사활동을 하고 있다. 張군을위해 장현태(張鉉台)변호사가 사건을 맡았다. 결국 경찰은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태로 張군을 검찰에 불구속송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검찰은 처음부터 사건을 풀어나가겠다는 의지로 수사검사였던 金검사 대신에 강원일(姜原一)부장검사, 조병길(趙炳吉)·이종왕(李鍾旺)검사로 바꾸었다. 수사팀들은 경찰에서 넘겨받은 수사기록을 샅샅이 검토해 나갔다. 검찰은 진범이 張군이 아니라 당시 朴양과 함게 해외연수원을 다녀온 대학생 鄭모군임을 밝혀내고 그를 긴급구속했다. 이때 긴급구속은 검찰사상 첫 사례로 꼽히고 있다. 1심 재판과정에서 검찰은 새로운 직접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鄭피고인이 법정에서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하면서 검찰에서의 자백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지법 동부지원 형사부는 82년7월9일 鄭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장은 양기준(梁基俊)부장판사가, 좌·우배석은 이호원(李鎬元)·강희부(姜喜夫)판사가 담당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피고인이 검찰에서 한 자백의 임의성은 인정되나 그 자백내용에 쉽사리 납득되지 아니하는 부분들이 있어 신빙할 수 없고 그밖의 나머지 증거들에 의하더라도 피고인이 이사건 범행을 범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무죄이유를 밝혔다. 이번 판결은 그동안 자백은「증거의 왕」이라는 수사관행에 쐐기를 박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검찰은 즉각 항소했다. 항소부인 서울고법 제3형사부(재판장 이한구·李澣九부장판사)도 같은해 11월20일 원심대로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자 검찰은 즉시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 제1부는 83년9월13일 鄭피고인에게 무죄를 확정시켰다. 대법원은 검찰이 鄭군이 범인이라고 주장한 각종 정황증거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鄭군은 살인자라는 누명을 벗고 자유몸이 되었다. 이성열(李成烈)·이일규(李一珪)·전상석(全尙錫)·이회창(李會昌)대법원 판사가 이 사건에 관여했다. 정군을 위해 朴承緖변호사가 사건을 맡았다. 수사기관은 결국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張군과 鄭군에게 엄청난 정신적인 피해만 안겨준채 공소시효 기간을 넘기고 말았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러나 朴양을 죽인 범인은 분명 우리 곁에 있다. 윤종열기자YJYUN@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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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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