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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이 살을 에던 지난해 12월 30대 후반의 한 남성이 55m 높이의 번지점프대 위에 섰다. 키 185㎝가 넘는 건장한 체격의 이 남성은 긴장 속에 '오 마이 갓(Oh, My God)'을 연발하더니 이내 "나는 다시 태어난다. 나는 할 수 있다"고 외치고는 멋지게 허공에 몸을 맡겼다. "나는 줄 덕분에 살았지만 누군가는 줄을 갖지 못한 채 세상 밖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남자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번지점프대에 오른 이 남자는 영원한 코리안 특급 박찬호였다.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던 최고의 투수에게도 은퇴라는 순간은 그렇게 다가와 있었다.
수명은 길어졌고 은퇴 연령은 40대까지 내려왔다. 정작 제2 인생은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막막하다. 박찬호가 올라섰던 번지점프대는 언젠가 누군가가 마음으로 올라섰던, 또 앞으로 누군가가 올라서야 할 자리다. 익숙했던 온실에서 나와 맞이할 도약의 장소. 이곳에서 멋진 점프, 성공적인 도전을 위한 듬직한 '줄(은퇴준비)'을 쥐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은퇴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국가적인 손실도 커집니다." 24일 서울 을지로 센터원 이스트타워 20층 사무실 문을 열자 책상을 뒤덮은 각종 서류와 보고서 더미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조금은 피곤한 듯한 얼굴이 나타나더니 부끄러운 듯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김경록(50ㆍ사진)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소장(미래에셋자산운용 사장)이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지난 21일 기존의 투자교육연구소와 퇴직연금연구소를 통합해 은퇴연구소를 재출범시켰다. 김 소장은 다음주 발간될 연구소의 첫 월간 '은퇴 리포트' 마감을 앞두고 막바지 작업에 한창 몰두하고 있었다. "보고서용 문체를 투자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바꾸는 작업부터 만만치 않더군요. 최종본이 나온 뒤에도 연구소 임직원 전원이 모여 여덟 번이나 회의하며 수정했습니다." '8번'이라는 말에서 은퇴교육 대중화와 활성화에 대한 김 소장과 연구원들의 책임감이 느껴졌다. '취임 후 해야 할 일을 생각날 때마다 적어두고 있다'는 김 소장 사무실 내 화이트보드도 이미 절반 이상이 빼곡한 메모로 가득 찼다.
"은퇴 후 창업을 선택하는 50대의 10명 중 8명은 3년 안에 폐업을 합니다. 은퇴 교육과 준비가 부족하다 보니 리스크가 큰 창업에 손을 대거나 자녀 사업에 돈을 투자했다 손실을 보는 경우가 많은 거죠." 김 소장은 아직까지 은퇴자에 대한 기본 교육조차 많이 부족하다는 데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은퇴 후 투자에 실패할 경우 노년 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아 개인은 물론 사회ㆍ국가적인 손실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 평균 수명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50대는 '설마 내가 90세 넘어서까지 살겠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안일함에 빠져 있다"며 "은퇴자나 은퇴를 앞둔 사람에 대한 기본 교육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지금은 '은퇴 후 삶'에 대한 연구에 빠져 있지만 지난 23년간 김 소장이 걸어온 길은 어찌 보면 은퇴교육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중ㆍ고등학생 시절부터 돈의 흐름과 구조에 관심이 많았던 김 소장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1990년 장기신용은행에 입사하며 금융투자업계와 인연을 맺었다. 1년간 영등포지점 주임으로 근무한 뒤 바로 은행 내 경영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이후 장은경제연구소를 거쳐 국민은행 경제경영연구원에서 채권연구원으로 활동했다. 1999년 미래에셋이 만든 한국채권연구원에 합류한 김 소장은 이후 2000년 미래에셋투신운용 출범으로 자산운용업계에 발을 들인 뒤 2009년까지 미래에셋자산운용 채권매니저, 채권운용본부장(CIO), 채권ㆍ금융공학 부문 대표 등을 지낸 채권맨이다. "은퇴교육과 관련된 커리어는 없어 보인다"는 농담 섞인 질문에 김 소장은 "은퇴교육을 목표로 두고 커리어를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기간 자산운용과 자산배분 업무를 하면서 은퇴교육에 필요한 자격을 쌓아왔다고 생각한다"고 진지하게 대꾸했다. "오랜 시간 인구통계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온 만큼 이 경험이 은퇴교육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김 소장은 2000년 투자의 장기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 관련 책을 읽다 처음 인구통계학을 접했다. 인구 구조의 변화가 자산시장과 금융투자업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한 김 소장은 2006년 미래에셋 제2회 '자산배분 포럼'의 대주제를 인구구조로 정했다. 일본 다이이치투자고문의 시모무라 미쓰오 사장, 미국 투자회사 스쿠더 인베스트먼츠의 부회장이자 '인베스트먼트 메가 트렌드'의 저작 밥 프뢰리히 등 전문가가 각국의 인구구조 변화와 이에 따른 시장 변화를 설명한 가운데 한국의 고령화와 자산시장 전망에 대한 발표는 김 소장 본인이 직접 맡았다. 이 포럼이 계기가 돼 '인구구조가 투자의 지도를 바꾼다'는 책도 냈다. 이 책은 130쪽의 작은 분량이었지만 '고령화 시대 진입으로 노후 대책ㆍ투자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제를 다양한 사례와 수치를 통해 명쾌하게 풀어내 금융투자업계에서 화제가 됐다. 운명적이게도 김 소장은 그로부터 7년 뒤인 2013년 은퇴자들의 노후 대책을 준비하고 투자 패러다임 변화를 선도하는 은퇴연구소장으로 취임했다.
은퇴교육 전문가로서 김 소장이 가장 강조하는 노후준비의 기본은 건강이다. "어떤 사람은 100세 넘어까지 잔병 없이 살다 평온하게 죽는 반면 어떤 사람은 80세 이전에 10년 넘게 병을 앓다 죽습니다. 어떤 것이 행복하겠습니까." 김 소장은 "아픈 기간을 단축하는 '병의 압축'이 중요한데 이는 평소 건강이 축적돼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며 "'병의 압축'을 통해 개인 삶과 사회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태권도 유단자인 김 소장도 꾸준히 운동을 즐기며 건강을 챙기고 있다. 고등학생 때 '공부만 했다'는 그는 대학교 태권도 동아리에 들어와 운동에 재미를 붙였다. '학창시절을 어떻게 보냈느냐'는 질문에 "태권도 동아리에 들어가 운동하고, 수업 듣고, 다시 태권도 하고…"라고 답할 정도다. 군 제대 후 배운 검도도 취미 중 하나다. 최근 연구소 재출범 이후 업무가 바빠 소홀해지기는 했지만 틈틈이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을 한다. 얼마 전까지는 단전호흡을 하며 심신을 수양하기도 했다. 주먹(태권도)과 칼(검도), 그리고 마음(단전호흡)으로 생활과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다스린 셈이다.
그는 병의 압축과 함께 '노후의 5중 보장'도 강조했다. 현재 국내에서는 국민연금ㆍ퇴직연금ㆍ개인연금이 노후를 보장하고 있지만 이 같은 3중 체제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김 소장은 "퇴직연금의 경우 중간 정산이 많이 이뤄져 쌓여 있는 돈이 70조원도 안 된다"며 "1,400조원에 이르는 호주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내 주택보유 비중도 75~80%에 육박해 비유동자산이 많은 편인데 이를 주택연금으로 유동화해 '4중 보장'을 하면 사망까지의 리스크를 헤지할 수 있다"며 "마지막으로 5중으로 월지급식 펀드를 더해 보장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가시간에 가족과 카페를 찾아 책을 읽는다는 김 소장은 '도서 추천' 요청에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준남의 '당신은 인생 후반기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라고 대답했다. 여가 시간에 읽은 책조차 직업과 관련된 것이다 보니 선뜻 답변하기가 멋쩍었던 모양이다. 그는 "건강부터 자산관리에 이르기까지 총 7편을 통해 은퇴 후 삶에 대한 내용을 아우르고 있어 유익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은퇴연구소도 앞으로 노후 재무설계를 중심으로 다방면의 전문가들과 협업해 은퇴자들의 사회적 네트워크부터 창업ㆍ직업모색 등에 이르는 각종 교육과 컨설팅으로 도움을 주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 소장이 2006년 저술한 책 서문에는 '가장 좋은 투자자 보호는 올바른 투자자 교육에 있다'는 미래에셋의 교육 철학이 새겨져 있다. 새로 태어난 미래에셋은퇴연구소가 만들어낼 많은 교육과 자료ㆍ연구의 결과물이 '은퇴 후'라는 점프대 앞에서 '오 마이 갓'을 외치는 이들에게 가장 든든한 보호의 끈이 돼주기를 기대한다. "아름다운 제2의 인생을 위하여 번지!"
●김경록 연구소장은 |
투자교육·퇴직연금 노하우 탄탄…자산배분 새 모델 제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