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토요 Watch] '안녕들 하십니까' 대학가 대자보 열풍

팍팍한 삶… 경쟁사회 울분… 손글씨로 세상과 소통하다 <br>취업난 정치권 실망 등 가슴에 쌓인 분노 표출<br>"감성적인 질문만 나열" 일부선 부정적 시선도

숙명여대 학생들이 지난 19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 명신관 앞에 길게 늘어선 게시판 글을 읽고 있다. /김연하기자


팍팍한 삶·경쟁과열 사회 울분 이슈화
안부 묻는 형식이 공감대 불러
정치문제 이슈화 등 SNS 활용만으론 한계
손글씨 진정성도 한몫


"학교에 이렇게 많은 대자보가 붙어 있는 것은 처음 봐요. 학생들이 이렇게 사회현상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도 아마 처음인 것 같습니다."(숙명여대 경영학과 2학년 양희주씨)


지난 10일 고려대 경영학과 4학년 주현우씨가 작성한 '안녕들하십니까'로 시작된 대학가의 대자보 열기가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고대에서 시작된 대자보 열풍은 현재 서울대와 성균관대·숙명여대·이화여대·연세대·중앙대·한양대 등 서울시내 대학을 비롯해 고등학교와 지방·해외 대학가로도 퍼지고 있다.

19일 서울경제신문 취재진이 찾은 숙명여대 명신관 앞에 자리한 게시판에는 '미안합니다. 안녕한 줄 알고 살았습니다' '실로 저는 안녕합니다' 등 수십 개의 대자보로 가득 차 있었다. 대자보 앞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참 동안 대자보를 읽고 있던 정다은(국문과 3학년)씨는 "이전에는 대자보를 잘 읽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민영화나 철도노조 파업도 그렇고 고대 학생의 대자보가 이슈가 돼 읽게 됐다"며 "대자보를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사회와 세상에 관심을 갖지 않고 너무 안일하게 살아온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됐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또 다른 3학년 학생도 "언젠가 우리도 졸업해 한 명의 사회 구성원이 될 텐데 그때 내가 어려움에 처한다면 대학생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지 않겠느냐"며 "대자보를 읽으며 경각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같은 날 중앙대 법학관 지하1층 벽면도 '안녕하냐는 물음에 부끄러움을 내놓습니다' '신방과 학생, 여기 안녕 못합니다' 등 학생들이 작성한 많은 대자보로 뒤덮여 있었다. 기말고사 기간이어서 많은 학생들은 전공 서적과 노트를 손에 든 채 대자보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소정(공공인재학부 3학년)씨는 "처음 대자보를 작성한 고려대 주현우 학생의 대자보가 도화선이 된 것 같다"며 "다들 생각만 할 뿐 행동하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 주현우씨가 먼저 나섬으로써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물꼬를 트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2학년 학생은 "사회는 안녕하지 못한데 그동안 나만 잘산 것이 아닌가 되돌아보게 됐다"며 "시험과 과제 등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사회 이슈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고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반면 대자보 열풍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학생도 있었다. 김혜린(숙명여대 무용과 2학년)씨는 "대자보 내용이 지나치게 감성적이며 사실을 적기보다 질문만 던지고 있어 크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고 다른 학생도 "주위의 친구들이 쓰니까 따라하기 식으로 늘어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자보 열풍은 대학가 곳곳으로 퍼져나가 교수들의 동참까지 낳고 있다. 지난 17일 중앙대 서울캠퍼스 서라벌홀에는 김성천·김연명·정슬기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작성한 '우리 제자들이 안녕하지 못해 우리도 안녕하지 못합니다'라는 내용의 대자보가 게재됐다.

대자보를 작성한 김연명 교수는 "굳이 교수로서가 아니라 대학 선배이자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자보의 내용에 공감하고 학생들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 작성하게 됐다"며 "(학생들의 대자보가) 불투명하고 불안한 미래와 올바른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것 같은 사회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작성 이유를 설명했다. 중앙대 3학년 김모씨는 "교수님들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 기쁘다"며 "학생들을 위해 나서주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18일에는 장경욱 동양대 인문대 교양학부장이 작성한 '얘들아 괜찮다! 안녕하냐고 물어도 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게시됐다. 장 교수는 대자보에서 '안녕하냐는 인사 한마디를 나누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시대를 물려주고 우리가 무슨 뻔뻔함으로 너희들의 목소리를 막겠느냐. 인생의 가치가 취업밖에 없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지상의 가치로 찬양 받으며 무슨 수단으로든 성공한 자만이 추앙 받는 이 시대는 너희들이 만든 게 아니다'라며 '변변한 정규직 일자리 없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우리가 어찌 너희를 비난할 자격이 있겠느냐 … 얘들아 우리가 서로에게 묻자. 힘없고 약한 사람들의 안부를 묻자'고 썼다. 이처럼 대학가를 중심으로 대자보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은 고교 시절부터 이어져온 과도한 경쟁과 심각한 취업난, 정치권에 대한 실망 등으로 학생들의 가슴속에 쌓였던 분노가 대자보를 계기로 표출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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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안정적인 일자리가 빠르게 줄어들었고 결국 청년층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사회나 정치에 관심을 두지 못하는 상황이 지난 10여년간 벌어졌다. 학생들은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했음에도 좋은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계속 경쟁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며 "정부는 이런 상황을 해결할 대안을 제시하기는커녕 오히려 민영화를 추구하면서 경쟁을 강화하고 비정규직 등을 양성하는 방향으로 갔다. 결국 과거에 안정적이던 일자리조차 그렇지 못한 상황에 대해 학생들의 분노가 나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노 교수는 "학생들이 트위터나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한계를 느낀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며 "트위터의 경우 상호소통이 아니라 파워트리안 등 일부의 의견을 퍼나르는 데 그쳤고 카카오톡은 특성상 소그룹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데 이를 경험한 학생들이 온라인이 정치·사회문제를 이슈화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매체라고 판단했고 결국 대자보를 선택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프라인인 대자보가 온라인을 만나 확산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요즘 대학가에서 볼 수 있는 대자보는 학생회 출마자의 선거공약 정도인데 자신의 실명을 밝히고 손글씨로 의견을 전달하는 것에 학생들이 신선함과 진정성을 느낀 것"이라며 "여기에 대자보를 찍은 사진이 온라인을 통해 유통되면서 전세계로 확산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초 작성자인 주현우씨의 '안부를 묻는 형식'이 학생들에게 공감을 불렀다는 분석도 나왔다. 설 교수는 "지금의 대자보는 특정한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기보다는 사회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제안의 형식인데 이런 부분이 학생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말했다. 노 교수도 "지금의 대자보는 그동안 운동권에서 사용하던 투쟁적인 언어를 나열하지 않고 개인에게 안부를 묻는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지금 당신이 처한 개인적인 문제가 사실은 사회문제와 연결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며 "안부를 물음으로써 사회적 이슈를 사적 담론으로 끌어냈고 이 부분에 학생들이 크게 공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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