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경기 진작을 위한 무차별 폭격(기준금리 인하) 여부를 결정하기에 앞서 조준사격을 시작했다. 이번에 발표된 금융중개지원대출(옛 총액한도대출) 개편안은 풍부한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의 설비투자를 지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새로 도입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24일 한은은 중기의 설비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설비투자 지원 프로그램'을 신설하고 총한도를 3조원으로 설정했다. 주요 중기의 설비투자 실적 및 계획이 지난 2012년 8조2,000억원에서 올해 6조7,000억원으로 약 18%나 감소할 것으로 보이고 최근 기업은행의 설문조사에서 중기의 37.7%가 설비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조건이 양호한 정책자금 공급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데 따른 한은 식 처방전이다.
특히 한은은 이 프로그램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오는 9월1일 제도 도입 후 1년간 취급된 신규 대출에만 이 프로그램을 적용하기로 했다. 재대출 혹은 기존 대출금의 만기를 연장하는 자금에는 이 프로그램을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중소기업의 실질적인 설비투자 확대를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또 설비투자와 관련성이 적은 부동산, 임대, 음식·숙박, 도소매업 등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고 지원기간도 최대 5년으로 설정해 중소기업이 안정적으로 설비투자자금을 대출 받을 수 있게 했다. 이 프로그램의 대출금리는 1%로 설정됐다.
이번에 1조원이 늘어나 총한도가 5조9,000억원이 된 '지방 중기지원 프로그램'의 경우 도산 위기에 몰린 지방의 음식·숙박, 도소매, 여행, 운수업 부문 중소기업을 타깃으로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내수가 침체되고 국내 여행이 급감하면서 지방 중소기업은 심각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한은은 "신용도가 낮은 지방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고신용등급(1~3등급)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대출프로그램 금리 역시 1%로 설정됐으며 제도 시행 이후 1년간 취급된 은행 대출에 대해 최대 1년간 지원해주기로 했다.
이번 금융중개지원대출 개편 방안을 두고 한은의 한 관계자는 "유럽중앙은행(ECB)의 TLTRO(표적 장기대출 프로그램)보다 더 정밀한 정책"이라고 자체 평가했다. ECB는 9월부터 은행권의 대 비금융부문 대출을 독려하기 위해 은행권에 4,000억유로를 저리에 지원하기로 했다. 은행권이 이를 낮은 금리로 비금융부문에 재대출해 경기를 살리라는 게 ECB의 계획이다. ECB가 은행의 비금융부문 대출에 집중했다면 이번에 나온 총액한도대출 개편안은 중소기업의 설비투자, 지방의 중소기업 등 지원 분야가 더 정밀하다는 설명이다.
한은은 이번 프로그램 개편으로 설비투자를 계획하는 중소기업에 최대 12조원을 지원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예컨대 고객이 은행창구에서 설비투자금으로 1조원을 대출해갈 경우 한은이 이를 전액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통상 25% 정도를 지원하고 나머지는 시중은행이 지원한다. 이번에 설비투자 지원 프로그램 한도가 3조원으로 설정됐으니 총지원 효과는 12조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지방 중기 지원 프로그램도 이번에 1조원 증액함으로써 관련 분야에 최대 4조원이 새롭게 지원될 것으로 한은은 보고 있다.
다만 정부가 경기 회복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한 속도전을 펴는 가운데 금융중개지원대출 개편안은 프로그램 특성상 빠르게 소진되지 않아 실효성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은이 프로그램 도입을 천명하고 시중은행에 관련 내용이 전달된 뒤 이것이 고객과 대면하는 하부 직원까지 전달되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만큼 대출이 활성화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4월 3조원 한도로 도입된 기술형 창업지원대출도 제도 도입 후 1년 동안 5,000억원 정도만 소진됐다 최근에야 1조2,000억원까지 불어났다.
한은 외에도 중소기업 설비투자를 지원하는 다양한 정책금융이 있다는 것도 설비투자 지원 프로그램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 중 하나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중소기업이 설비투자를 늘리지 못하는 것은 불투명한 경기 전망이나 투자 분야에 대한 확신이 떨어지기 때문이지 자금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