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10월 24일] <1532> 정한론


'불구대천의 적인 조선을 반드시 정벌해야 일본의 위신이 선다. 30개 대대를 동원하면 50일 안에 정복이 가능한 조선을 놓아두면 러시아나 프랑스에 기회를 빼앗길 수 있다.' 1869년 조선과 접촉했던 일본 외교관이 제출한 보고서의 골자다. 조선 침공론이 나온 직접적인 원인은 새로운 국교수립을 원하던 일본의 요구를 조선이 거절한 일. 대원군 치하의 조선은 '왜왕이 황제라 칭하고 새로운 국새를 사용'한 점을 들어 일본 국서의 접수조차 거부했다. 당장 조선을 응징하자는 정조론(征朝論)이 들끓었다. 전쟁 비용은 조선의 풍부한 곡물로 회수할 수 있고 조선인을 끌어다 홋카이도 개발에 투입하자는 논의까지 나왔다. 정조론이 메이지 조정에 대한 반란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정한론(征韓論)으로 이름이 바뀐 논쟁은 일본의 권력집단을 두 패로 갈라놓았다. 근대화 개혁으로 특권을 상실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폭발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던 강경파는 조속한 조선 정벌을 주장한 반면 온건파는 정벌에는 찬성하지만 자칫 외채와 조세부담 증가가 불가피하기에 건전재정 확립과 수출진흥, 불평등조약 개정에 먼저 힘쓰자고 맞섰다. 대만 정벌이 손쉽게 끝난 뒤 논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지루한 논쟁이 막을 내린 것은 1874년 10월24일. 일왕이 온건파의 손을 들어주고 강경파 대신 5명이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논쟁은 끝났다. 패배한 강경파의 반란(서남전쟁)도 정부군은 어렵지 않게 눌렀다. 강경파의 몰락에도 정한론의 생명은 끊기지 않고 일본은 결국 조선을 집어삼켰다. 조선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던 일본이 오늘날에는 달라졌을까. 정한론을 미화하는 극우 역사교과서가 판친다. 그런데도 한국은 '과거보다 미래를 얘기하자'고 한다. 망각유전자의 확산이 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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