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소나기가 쏟아진 지난 26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경동시장. 장 보러 나선 주부들로 북적여야 할 시간이었지만 시장 안은 한산했다. 대형마트의 공세에 재래시장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면서 젊은 고객들의 발길이 끊긴 탓이다.
하지만 2시간여 가까이 시장을 둘러보니 예년과는 사뭇 다른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당장 매출이 크게 늘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시장을 찾는 고객이 지난해 추석보다 늘어났다는 게 가장 큰 변화다. 12년째 과일장사를 하고 있는 부산청과의 이지형씨는 "올 초에는 세월호 참사로 정말 힘들었는데 하반기 들어 소폭 나아지더니 광복절 이후에는 매출이 지난해보다 5%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맞은편 동명농산의 김상수 사장은 "38년 만의 이른 추석이라고 해서 과일값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10% 정도만 올랐다"며 "백화점과 대형마트에 물량이 먼저 공급되기 때문에 얼마나 물량을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전했다.
손님이 뜸한 청과시장과 달리 정육점이 밀집한 맞은편 동에는 흥정하는 풍경이 제법 눈에 띄었다. 민희네정육점의 최현일씨는 "이 시간이면 저녁 찬거리를 사러오는 손님이 꽤 된다"며 "상반기에 고꾸라졌다가 이번주 들어 매출이 조금 늘었는데 연말까지 가면 지난해 수준은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25년 동안 정육점을 운영했다는 광동상회의 최진희씨는 "늘 어렵다고 하지만 올 상반기가 가장 안 좋았던 것 같다"며 "그래도 최근 들어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길 건너 약령시장에도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한약재 도매상을 하는 상향당약재의 고상현 대표는 "2주일 전부터 홍삼을 찾는 손님이 10%가량 늘었는데 구경만 하고 정작 구입은 대형마트에서 해 속상하다"며 "그래도 지난해보다 홍삼을 달여달라는 문의가 많아 오늘은 두 시간 늦게 가게 문을 닫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체감경기는 예년과 비슷해도 손님이 늘어났다는 게 일단 좋은 징조라는 설명이다.
27일 찾은 남대문시장도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조심스럽게 묻어났다. 한가람상회에서 원단을 파는 박영목씨는 "우리는 주로 의류쇼핑몰에 포목을 주는데 이달 들어 젊은 아가씨들이 자주 온다"며 "지난해에는 고가 원단과 저가 원단 비중이 3대7이었는데 요즘은 얼추 비슷해졌다"고 전했다. 옆 건물에 위치한 도기상가에도 예상보다 손님이 북적댔다. 17년째 그릇가게를 한다는 마산도기의 강춘희씨는 "3년 전에 연락이 끊겼던 단골이 이번에 와서 물건을 많이 떼갔다"며 "지난해 추석과 올 설까지 죽을 쒔는데 이번 추석은 확실히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가 이날 발표한 차례상(7인 기준) 예상 비용을 보면 올해도 전통시장이 대형마트보다 23%가량 싼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내 전통시장은 평균 26만1,669원이었고 대형마트는 33만9,572원에 달해 전통시장이 7만8,000원 저렴했다. 4인 기준으로 차례상을 차려도 전통시장(19만1,100원)이 대형마트(27만2,500원)보다 8만1,400원 적게 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정호 경동시장상인연합회 총무국장은 "뉴스에서 추석 경기가 살아난다고 하는데 전통시장은 다음주가 최대 성수기여서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며 "올 상반기에 워낙 장사가 안 됐던 터라 상인들의 표정이 밝아진 것만으로도 일단 힘이 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