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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째 국대' 이규선 "애국가 지겹도록 듣고 와야죠"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디펜스 이규선. 아이스하키에서 디펜스는 축구의 중앙 미드필더, 농구의 포인트가드 같은 역할이다. /이호재기자

여자 아이스하키 최선참 이규선, 영화 ‘국가대표2’로 재조명

열여섯에 국가대표 발탁, 생활용품 판매점서 ‘투잡’ 뛰며 선수생활


2년 전부터 일본어 전공도 병행, “번역가, 대표팀 감독이 꿈”

지난 2009년 개봉한 영화 ‘국가대표’는 800만 관객을 끌어모았다. 비인기 종목인 스키점프를 소재로 국내 스포츠 영화의 흥행사를 다시 썼다. 영화계에 따르면 국가대표2가 내년 초 개봉을 목표로 조만간 크랭크인 한다. 이번엔 여자 아이스하키다. 국가대표가 국내 최초의 스키점프 대표팀을 조명했듯 국가대표2는 2003년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을 위해 결성된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얘기를 다룰 예정이다.

2003년이라면 그때 멤버는 모두 은퇴했을 것 같지만 여전히 대표팀을 지키는 선수가 2명 있다. 그중 이규선(31)은 그때 이후로 잠깐의 공백도 없이 태극마크를 유지한 유일한 선수다. 국내 여자 아이스하키 역사의 산증인이자 대표팀 최선참이며 여전히 수비 에이스인 이규선을 지난 10일 서울 태릉 실내빙상장에서 만났다.

열여섯 살이던 2000년 대표팀에 처음 승선해 벌써 16년째. 그동안 팀이 치른 모든 대회에 이규선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전했다. 부상이나 여타 이유로 한두 번은 걸렀을 법도 한데 대회 때만 되면 아프던 몸도 멀쩡해졌다. 아이스하키계에서는 이규선을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부른다. “16년째 개근…. 맞아요, 그러고 보면 저 정말 미쳤나 봐요. 살아있는 화석이라….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요.”


◇훈련비 0원, 나무스틱으로 맨땅에 헤딩하던 시절=2003년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은 여자 대표팀이 처음 해외에 나가 치른 메이저급 국제대회였다. 대표팀이 처음 생긴 건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당시 아시안게임은 강원에서 열렸다. 아오모리에서 한국은 4경기에서 80골을 내주고 1골을 넣었다. 가장 근소한 차로 진 게 북한전 0대10이었다. 4전 전패. 선수가 부족해 엔트리 22명도 채우지 못할 정도였으니 애초에 이기기를 바라고 나간 대회는 아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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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막내급이었던 이규선은 “대표팀 대부분이 스피드스케이팅이나 피겨에서 넘어온 선수들이었다. 아이스하키는 스케이팅 기술부터가 달라 상대를 쫓아가기도 버거운 경기가 계속됐다”고 돌아봤다. 다른 나라는 카본 소재의 스틱을 쓰는데 한국만 전원이 나무스틱을 썼다고 한다. 훈련비도 지금처럼 체계화되기 전이라 선수들은 돈을 받기는커녕 자비로 장비를 마련해야 했다. “지상훈련도 야산을 뛰어다니는 게 전부였어요. 그래도 모여서 아이스하키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던 시절이었죠.” 국내 여자 아이스하키는 워낙 저변이 빈약해 동호회에서는 사람이 모자라 게임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대표팀이지만 엘리트 선수가 아니다 보니 아이스하키에 대한 염증 같은 것은 느낄 일이 없었다. 스틱만 잡으면 두근거렸고 흠씬 땀에 젖은 뒤 장비를 벗을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좋아서 몰두하는 사이 대표팀의 경쟁력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2년 뒤인 2005년 한국은 뉴질랜드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국제대회 사상 첫 우승을 달성한다. 3전 전승. 물론 전력이 비슷한 팀들만 모인 5부리그(디비전2 그룹B) 세계선수권이었지만 아이슬란드를 8대2, 뉴질랜드를 5대2, 루마니아를 2대1로 꺾으며 이기는 법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대표팀의 동계아시안게임 사상 8년 만의 골도 2011년 이규선의 손에서 터졌다. 그가 뽑은 하키 생애 최고의 순간은 2013년 스페인 하카 세계선수권. 주장으로서 이 대회 5전 전승 우승을 이끌어 한국은 4부리그(디비전2 그룹A)로 승격했다. 아이스하키는 리그별 수준 차가 커 승격팀은 다음 해 바로 강등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국은 지난해 이탈리아 아시아고 세계선수권에서 4부리그 잔류 목표를 뛰어넘는 동메달 쾌거를 이뤘다.

◇번역가가 꿈인 13학번=대표팀의 훈련수당은 하루 5만원, 최대 훈련일수는 1년에 240일이다. 규정상 모든 종목이 그렇다. 다른 종목이야 대표팀 소집이 없을 땐 프로팀이나 실업팀에서 안정적으로 운동할 수 있지만 여자 아이스하키는 학교 운동부도, 실업팀도 없이 오로지 대표팀뿐이다. 훈련 상대도 남자 중학교팀이다. 이규선은 생계를 위해 ‘투잡’을 뛰어야 했다. 생활용품 판매점에서 오전조 부점장으로 일하고 오후에는 대표팀 훈련에 참여하는 생활을 2~3년간 계속했다. 일을 그만둔 건 2008년쯤. “사정이 있다고 오전조로만 일하는 것도 눈치 보였어요. 20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시기이기도 했고…. 아이스하키를 그만두고 새 직장을 구해 자리 잡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심각한 고민을 했었죠.” 이규선은 그래도 스틱을 놓을 수 없었다. 다행히 당시 일부 지역에서 강습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이규선은 성남시 분당의 주니어팀과 목동 성인 동호회팀에 1주일에 한두 번씩 코치로 나가고 있다.

고등학생 때 대표팀이 돼 대학생활 경험이 없는 이규선은 시간과 돈을 쪼개 사이버대학에도 진학했다. 한국외대 일본어학부 13학번이다. 일본 지역팀과 교류가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어에 관심이 생겼고 독학에 한계를 느껴 전문교육을 받기로 한 것이다. 오후 4시께 태릉에서 시작되는 대표팀 훈련은 밤 10시가 돼서야 끝나지만 이규선은 잠잘 시간을 아껴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체육관련 번역서를 보면 아쉬운 점이 많아요. 아무래도 선수 출신이 번역하면 보다 정확하고 전문적인 접근이 가능하겠죠?” 번역가가 꿈인 이규선은 일본 리그에서 심판으로 활동할 계획도 갖고 있다. 물론 가장 큰 꿈은 대표팀 감독이다. 최근 캐나다에서 새로 온 외국인 감독의 지도법을 눈여겨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맏언니 이규선은 주장을 놓은 지 오래지만 감독은 이규선을 “큐”라고 부르며 대표팀 전반에 대한 관리를 맡기고 있다.

◇이겨야만 들을 수 있는 애국가, 지겹게 들어야죠=축구는 경기 전 양국의 국가가 차례로 울린다. 하지만 아이스하키는 경기 후 이긴 팀 국가만 나온다. 진 팀은 이긴 팀 국가가 끝날 때까지 경기장을 빠져나갈 수 없다. 2003년만 해도 여자 대표팀에겐 잔인한 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룰을 즐긴다. 다음 달 스코틀랜드 세계선수권에서 5경기 전승 우승이 목표. 목표를 이루면 3부리그 승격이다. 홈팀 영국과 카자흐스탄전이 관건인데 카자흐스탄은 4년 전만 해도 맞붙으면 우리가 10골 차 이상으로 밀리는 팀이었다고 한다. 경기 내내 퍽도 제대로 소유하지 못하고 하프라인을 넘어가기도 어려웠다. 그랬던 팀을 이기겠다고 당당히 말할 정도가 된 것이다. 불과 몇 년 만에. 이규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우승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애국가, 지겹도록 듣고 오겠습니다.”

지난해 개최국 자동출전이 확정되면서 대표팀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무대도 밟게 됐다. 수준별로 따로 대회를 치르는 세계선수권과 달리 세계 최강 7개국에 개최국 한국이 참가하는 방식이다. 한국은 최하위가 당연해 보이지만 6강 진출로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각오다. 올해 은퇴하려고 했던 이규선이 팀에 남기로 한 것도 올림픽 참가가 확정됐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20년간 아이스하키만 바라본 인생이기에 올림픽으로 마지막 결실을 맺고 싶었다. 이규선은 연세대에서 선수생활을 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이스하키에 빠져들었다. “스피드가 좋고 단순하지 않아서 좋고 박진감 넘쳐서 좋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끝까지 말렸지만 딸을 이길 수는 없었다. 딸은 최근 아버지에게 “평창까지 뛰고 은퇴하겠다”고 ‘공식선언’했다. 어깨 회전근 손상과 무릎 염증, 발목 피로골절에 시달리는 딸이 안쓰러웠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아버지도 선망하던 올림픽이다. “이왕 하기로 한 거 갈 데까지 가보라”고 응원했다. 이규선은 “2018년이면 30대 중반이다. 하지만 외국에는 40대 선수도 있다. 제가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렸다”며 자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국제대회에서 이겨서 애국가를 들어도 눈물이 잘 나지 않는 편이에요. 그런데 올림픽에서 애국가를 듣는다는 건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거 있죠. 상대팀 국가만 듣다가 은퇴하진 않을 거예요.”


양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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