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금융은 금융이다, 정치가 아니다


김홍범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ㆍ한국금융학회 회장)


금융이 어지럽다. 올해도 정보유출사태·KB금융사태, KT ENS 및 모뉴엘 부당대출 사건 등 대형 사고가 줄을 이었다. 이런 와중에 금융권 인사에서 특정 학맥, 관치(官治)와 정치(政治)의 경쟁적 개입이 날로 점입가경이라는 언론 보도가 넘친다. 진행 중인 우리은행장 선임과정이 그런 일례다. 올해 세계경제포럼(WEF)의 금융시장 성숙도 평가에서 80등이라는 딱한 성적을 받은 우리지만 내년에는 아예 100등 밖으로 밀려날까 두렵다.

관치서 진화한 정치금융 폐해 우려


2008년 글로벌 위기가 터졌을 때만 해도 금융이 이렇지는 않았다. 금융당국과 시장이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운도 좋았기에 위기의 직격탄을 피해갈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금융시장은 WEF 평가에서 지금보다 한참 높은 37등이었으나, 그 직후부터 성적이 뚝뚝 떨어져 급기야 아프리카의 말라위(79등)나 우간다(81등)와 순위를 다투는 처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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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년간 금융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역설적이지만 우리나라가 지난 글로벌 위기에서 한 발짝 비껴나 있었다는 점이 금융의 쇠락을 재촉한 요인 중 하나다. 당시 미국과 유럽 선진국은 대형 금융회사들의 도산으로 혹독한 구조조정을 이행해야 했다. 이를 보며 우리 국민은 안도했었다. 1997년 환란으로 고강도 금융ㆍ실물 구조조정을 감내했던 우리 아닌가. 그런데 금융이 글로벌 위기의 다급한 순간을 넘기자 의기양양해진 금융당국이 과거보다 더욱 당당하게 관치를 들고 나왔다. 위기 수습을 위한 선진국의 규제강화 대열에 슬쩍 편승한 것이다. 그렇잖아도 관치의 불투명성과 비전문성으로 오염된 금융이 본격적으로 후진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반세기 전으로 눈을 돌려보자. 정부가 경제개발에 올인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금융관료의 순발력과 추진력은 핵심 미덕이었다. 은행의 자금배분, 경영과 인사에 대한 당국의 직접적 개입, 즉 관치금융은 압축성장 달성이라는 당시의 지상명제 아래 정당화됐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국민 경제의 덩치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지속 성장을 위해서는 정부의 순발력ㆍ추진력보다 민간의 전문성ㆍ판단력이 훨씬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민간 자율은 확대됐고 관치는 축소되는 듯했다.

그러나 관치는 사라지지 않았다. 환란에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진화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 형성된 모피아(전ㆍ현직 고위 금융관료 집단)가 회전문 인사를 통한 금융관료의 정계나 업계 진출을 지원하는 끈끈한 네트워크로 작용하면서, 관치금융은 21세기에도 세련된 방식으로 번성해왔다. 관치는 평상시 각종 폐해를 부르지만 위기시에는 해결사를 자임하며 새 동력을 얻는다. 2008년 위기 이후의 관치 강화도 그런 맥락이었다. 한편 지난 봄 세월호사태로 모피아의 대외적 입지는 급격히 좁아졌다. 이를 틈타 정치권 연줄을 타고 내려온 인사들이 금융 요직을 거머쥐는 신종 정치금융이 기승을 부린다 하니 어이없다. 이는 기존의 관치금융보다 더 심각한 폐해를 초래할 것이다. 야심 있는 금융인이라면 이제 정치권 줄 대기에 여념이 없게 생겼다. 이래저래 금융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지배구조 규준 잘 만들어도 공염불

얼마 전, 금융위는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을 공표했다. 규준이 아무리 모범이요, 정상이라도 관치ㆍ정치가 금융을 좌우하는 비정상적 현실 앞에서는 공염불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옛말은 그래서 오늘 절실하다. 정녕 '비정상의 정상화(正常化)' 구호는 비정상이 정상 위에 군림하는 '비정상의 정상화(頂上化)'로 귀결되고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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