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기업이 소프트웨어(SW)를 불법 복제해 사용하면 안 된다는 법 조항이 어디에 있느냐"고 따지듯 묻는 전화를 받았다. "저작권법에 불법 복제를 처벌하는 조항은 있지만 불법 복제해 사용하면 안 된다고 규정한 조항은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안 된다는 법 조항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설명으로 통화를 마쳤다. 그러나 황당한 느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는 SW 불법 복제에 대한 우리나라 일부 기업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글로벌 기업들 "사서 써라" 공세 강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지 4개월이 지났다. FTA 발효 초기에는 해외 SW 회사들이 우리나라에 '소송 태풍'을 몰고 올 것이고 법률 시장 개방으로 해외 로펌이 저작권 관리에 미흡한 국내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남발할 것이라는 우려도 많았다. 이런 줄소송이 국가 간 무역 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염려를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SW 불법 사용과 관련해 통상협정 위반이 된다거나 상계관세 등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일부 우려는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글로벌 SW 회사들이 정부 부처와 기업을 상대로 'SW 불법 사용' 문제를 거론하며 추가 구매를 요구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갑작스럽게 추가 구매를 요구하는 일부 SW 회사의 행보가 지나치다는 지적도 있다. 물론 FTA를 방패로 악용하는 저작권사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작권사를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업계에서는 터질 것이 터졌다는 분위기도 느껴진다. 그간 많은 기업과 기관이 SW 예산 부족을 핑계로 실제 필요한 것보다 적은 수량으로 라이선스를 계약하고 초과 사용해왔다. 기업 경영진들은 "그럴 리 없다"고 하겠지만 현장에서는 "한정된 예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실무담당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외산 SW에 대한 저작권 분쟁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기관과 기업이 그동안 불법 SW 사용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업과 기관이 똑똑한 소비자로서 잘 대처하고 협상하는 등 리스크를 관리하면 막을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SW는 기업이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지속적인 경영을 위해 계속 관리해야만 한다. 회사는 관리를 통해 회사의 자산에 대한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
며칠 전 법무부는 외국 로펌 3곳에 대해 법률사무소 설립을 인가했다고 발표했다. 1~2년 안에 법률 시장이 추가 개방되면 외국 로펌도 국내법 사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국내 정서를 고려해 보류됐던 지식재산권 분쟁이 더 확산될지도 모른다.
SW 예산 현실화, 자산으로 관리를
정부는 지난달 대통령훈령으로 '공공기관의 소프트웨어 관리에 관한 규정'을 발표하는 등 대책 마련을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여러 정부부처가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고도 한다. 미리 현실적으로 상황을 예측하고 대책을 세웠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방안을 찾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그동안 SW 개발의 중요성만 강조해온 정부는 물론 기업ㆍ기관은 지금이라도 현실적인 SW 구매 예산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SW를 기업의 자산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거나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 정부와 기업ㆍ기관 모두가 '스마트 컨슈머'로서 SW 회사와 상생할 수 있는 구체적인 노력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