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기고] 기업 인수의 조건

외환위기 이후 기업경영에서 두드러진 변화 가운데 하나는 투자행태의 변화다. 과거와 같은 막대한 투자가 지양되면서 기업투자가 저조한 것이 전체 경제성장의 위축을 유발한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지만 기업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투자행태 변화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모든 부문이 성장하던 지난 시기에는 선점의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다소간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과감히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대한 투자규모가 요구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기업 경영자가 신규사업에 도전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무모하다고 생각할 만큼 왕성했던 기업가 정신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러한 경제 환경 변화를 거스를 수 없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재무적 투자자 확보가 관건 최근 몇 년간 나타난 기업인수 및 합병 활동도 이러한 환경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영업활동을 하는 기업을 인수하는 것은 새로운 사업에 진입할 때 발생하는 위험을 크게 줄인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또 경제 전체적으로 보면 이러한 기업인수 및 합병은 과거와 달리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기도 하다. 경제가 성숙화되면서 도태된 기업들이 나타나며 이들 기업의 자본이 사멸되기보다는 새로운 경영자를 만나서 다시 활성화될 수 있어서다. 하지만 기업인수 및 합병은 인수기업에게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위기를 유발하는 요인이기도 한다. 피인수기업의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기 때문에 인수기업이 무리한 인수로 인해 자금난이 악화되고 파산에 이르는 것도 비일비재하다. 그렇기에 기업경영권 확보를 목적으로 한 전략적 투자자가 재무적 투자자를 어떻게 확보하여 차입부담 없이 안정적으로 기업을 인수하는가가 기업인수의 성패를 좌우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 때때로 충분히 인수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기업은 부채성 자금 조달을 통해 기업인수를 성취하려 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과거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미국의 '정크본드의 왕'이라고 지칭되던 마이클 밀켄의 기업인수 전략이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지탄받았음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금호그룹의 대우건설 인수 실패 사례도 충분한 자기자금 확보의 필요성과 함께 재무적 투자자를 유치하는 편법의 문제점을 잘 보여 준다. 최근 현대건설의 인수가 금융시장의 화젯거리다. 공개입찰 시 현대그룹의 매수금액인 5조5,000억원 중에서 당초 예금으로 신고됐던 1조2,000억원의 실체가 무엇인가가 논란의 중심에 있고 채권단의 양해각서(MOU) 해지 결정은 법원의 가처분신청으로 확산됐다. 일부에서 보도하듯이 그 자금이 브리지론이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일시적 자금조달에 불과한 것이므로 기업인수 자금으로 인정될 수는 없다. 그것이 통상적인 대출이라고 하더라도 대출조건에 따라 인수 및 피인수기업의 재무적 안정성이 크게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공개입찰 약정서에 해당 사항에 대한 정보제공이 명시돼 있다면 현대그룹은 최초 예금으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데 대한 책임감을 갖고 반드시 해명해야 한다. 채권단도 정보 공개 투명해야 현대건설 인수를 둘러싼 잡음은 단순히 채권단과 인수기업 간의 사적인 영역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련 당사자 대부분이 공개기업이며 동 사안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할 때 이를 단순히 사적 영역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현재 시장이 우려하는 것은 자금조달구조가 비정상적으로 이뤄져 현대건설의 기업인수가 오히려 또 다른 부실을 야기할 가능성이다. 필자로서는 아직까지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장이 의심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현대그룹을 MOU 대상으로 선정한 채권단이나 현대그룹 모두 정보의 투명성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양자 모두 투명하게 실체적 진실을 밝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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