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대한생명을 인수한 한화그룹은 만 1년이 지난 지금도 걸핏하면 터져 나오는 추측성 `로비설`에 발목이 묶여있다.
한화는 입찰 당시 경쟁사였던 메트라이프보다 월등히 높은 가격을 써냈고, 공적자금관리위원회의 엄밀한 심사과정을 통과해 인수에 성공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기준이나 과정을 바라보기보다는 `정치적 힘`에 의존했을 것이란 막연한 의혹의 시각이 훨씬 팽배해 있다.
이승철 전경련 상무는 "(대한생명을) 외국 자본이 인수했더라도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했겠느냐"고 반문한다.
검증 안되는 의혹에서 뿐 아니라 실질적인 제약에서도 한화는 `토종 자본`이란 이유만으로 감내해야 할 불이익이 많다.
공적자금위원회는 한화에게 향후 3년 동안 지분 매각을 제한했다. 반면 인수 과정에 대주주로 참여했던 오릭스 등 외국 회사에게는 제한 기간을 1년으로 낮췄다.
◇손 묶고 발 묶은 규제= 국가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외국 자본에게 국내 금융업 진출을 완전 개방했다. 비교적 싼 가격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옵션도 받아주면서 한마디로 `가져가기만 해달라`는 저자세를 취했다.
같은 시기 국내 산업 자본에 대해서는 강경 일변도로 금융업 진출을 억제했다. 은행업의 경우 10% 이상 주식을 소유하지 못하게 했고, 4% 초과 보유분에 대해서는 아예 의결권 행사를 금지시켰다. 제2금융권도 각종 이유로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고 있다. 외자유치라는 대의 명분에 가위눌린 결과였다.
외국 자본의 급속한 잠식은 예견됐던 일이다. 전경련에 따르면 지난해 9월말 현재 국내 은행의 외국 자본 지분율은 38.6%, 시중은행만 따지면 43.4%에 이른다. 증권과 보험사도 지난 2002년말 현재 각각 14.5%와 10.5%에 달한다. "산업자본의 금융업 영위 제한을 풀어달라"는 재계의 되뇌임이 무조건적인 `투정`만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현재 산업자본의 금융기관 소유를 법규에서 명시적으로 규정한 나라는 미국뿐이다. 영국과 일본 등에서는 산업과 금융의 융합화 현상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에서 조차 은행 및 은행 지주회사에 대해서만 규제를 하고 있다.
환란 직후부터 국내 금융기관의 M&A 실태를 지켜봐온 김승유 하나은행장 조차 "외국자본에 의해 국내자본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역차별에 무너지는 중추 산업= 소버린과 경영권 분쟁에 돌입한 SK㈜의 사례는 국내 기업이 외부의 도전에 적절하게 대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전달해주는 사례다. 사실상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SK가 적대적 M&A의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그룹 자체가 공격받고 있다는 이야기와 동일하다.
외부 공격에 대해 공동 방어의 권리가 있는 SK그룹 계열사들은 하지만 현행법상 출자총액제한 규정 등에 묶여 `강건너 불보듯`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입장이다.
"M&A 공방의 공격측인 소버린은 투자펀드라는 성격상 이론적으로 무한한 자금을 끌어모을 수 있지만 방어측인 SK그룹은 자금조달의 한계, 자금 집행의 한계, 반기업 정서로 무장한 국민 여론의 공세 등으로 사실상 수족이 묶여있다."(금융계 한 관계자)
현재 국내 전체 상장회사 10%의 최대 주주가 외국인이고, 증시의 외국인 투자비중은 40%를 넘는다. 외국 자본은 언제라도 적대적 M&A에 뛰어들 수 있다. 반면 지난 2002년 4월 부활된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총자산 5조원 이상의 그룹에 대해 순자산의 25%를 초과해 출자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방어수단은 묶어놓고 전쟁터에 내보낸 격이다.
◇국내 자본에 대한 무조건적 편견= 환란 직후인 지난 98년 정부의 고위 당국자는 공식석상에서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국내 기업이 외국에 팔린다고 해서 공장이 해외로 옮겨가지는 않는다는 논리였다. 대통령조차도 여기에 철저하게 동조했다.
외자유치가 최우선시되던 시각은 결국 `외국 자본=절대선`이라는 왜곡된 등식을 만들어 냈다. 나아가 `토종자본은 될 것도 안 되지만 외국자본은 안 될 것도 된다`는 왜곡된 결과로 이어졌다.
이승철 전경련 상무는 "우리나라는 제도상의 역차별보다도 국민 정서상의 역차별이 크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국민 정서에 영합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의 `포퓰리즘`도 기업들의 운신 폭을 좁게 했다. 최근 신성장 엔진의 대안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기업도시` 역시 경제적 환경이 조금만 바뀌면 `특혜성 시비`에 휘말릴 것이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외국자본 만큼의 `당근`은 주지 못하더라도 발목만은 잡지 말라는 것이 국내 기업의 소망"이라고 말했다.
<김영기 기자 you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