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2월22일] <1274> 로도스 함락

1522년 12월22일, 동지중해의 작은 섬 로도스. 성요한기사단과 주민 대표가 오스만튀르크와 마주앉았다. 항복협상을 위해서다. 기사 700여명을 핵심으로 6,500여명이 10만명을 넘는 오스만튀르크 군대에 맞선 지 5개월여. 전력의 절반을 상실한 가운데 견고하던 성채는 누더기로 변하고 탄약도 떨어진 방어 측에 오스만의 술탄 쉴레이만 1세는 파격적인 항복조건을 내놓았다. ‘기사들은 장비와 재화ㆍ성상을 갖고 12일 이내에 섬을 떠날 수 있으며 원하는 주민들도 3년 이내에 언제든지 이주를 허용한다. 남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 기사단 내부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해 끝까지 싸우자는 주장이 우세했지만 관대한 항복조건에 동요하는 주민들의 뜻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성요한기사단은 섬을 내줬다. 오스만 입장에서는 앓던 이를 뺀 격이었다. 제국의 앞바다에서 해적질을 일삼는 한줌의 무리가 웅거한 ‘그리스도의 뱀둥지’를 허물었으니까. 철수하며 쉴레이만 1세를 ‘진정한 기사’라고 평가했던 성요한기사단은 적 대신 교황과 기독교 왕국을 원망했다. 애타게 바라던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신대륙 경영에 열을 올렸고 포르투갈은 중국과 일본 교역 루트 발굴에 정신을 팔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왕권 강화에 매진했을 뿐이다. 로도스섬 공방전은 유럽의 권력지도에 변화를 몰고 왔다. 번영하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교역 루트가 막혀 스페인과 프랑스ㆍ영국이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단 한발에 저택이 무너지는 오스만 대포의 위력을 실감한 각국은 포병 양성을 위해 과학에 투자하고 국가상비군 체제 도입을 서둘렀다. 로도스섬 공방전은 종교보다 국가와 전제군주의 왕권이 중시되는 근대가 열렸음을 확인해주는 이정표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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