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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에 대한 시장의 불신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 몇 년으로 한정해도 한은의 경제상황에 대한 '오판'은 한두 차례가 아니다. 하물며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불리며 적어도 한은 내부에서만큼은 유례없는 신뢰를 받았던 이성태 전 총재도 '신뢰의 위기'를 겪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기준금리를 인상해 시장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금리를 올려 '거꾸로 가는 한은'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지금 한은이 겪는 위기는 당시와는 차원이 다르다. 기준금리야 시장참여자들이 때로 '간교'할 만큼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평가하기 힘들더라도 경기진단과 내부에서 벌어지는 불통의 모습은 정도를 넘어섰다고 할 정도로 혼선이 극심하다.
◇독립성 논란에 불통까지 깊어지는 불신의 늪=김중수(사진) 한은 총재가 취임하던 2010년 4월, 한국은행은 당시 극심한 독립성 논란에 시달렸다. "한은도 정부"라는 김 총재의 발언이 문제가 됐다. 이명박 정부 초대 경제수석 출신인 그의 평소 사고방식이 여과 없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런 논란은 통화정책에서도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0년 9월 기준금리 동결.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에서 벗어났고 물가상승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며 그해 7월 기준금리를 인상한 한은은 '징검다리'식 인상에 대한 시장의 기대를 여지 없이 무너뜨리며 금리를 동결했다. 그해 11월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를 의식한 결정이었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청와대가 최대 국가 행사로 내세운 G20 회의가 통화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후 김 총재는 기준금리를 꾸준히 올렸지만 그 과정에서 '소통' 문제가 야기됐다. 각종 강연과 회의에서 기준금리 동결을 시사하고는 인상하는가 하면 인상할 듯한 발언을 하고는 동결하는 오락가락 행보가 계속됐고 그 때마다 채권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불통 중수'라는 별칭은 이 즈음 생겨났다.
◇금통위원까지 비판 가세=최근에는 금융통화위원들까지 한은 집행부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25일 한은이 공개한 6월 금통위 의사록에 따르면 한 금통위원은 "한은의 올해 경기전망은 상반기 중 유로 지역 재정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될 것이라는 인식하에 '상저하고(上低下高)' 형태를 보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면서 "유로 재정위기가 앞으로 상당 기간 명확한 해결점을 찾지 못한 채 관련 국가의 재정위기가 순차적ㆍ동시다발적으로 부각되는 형태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그는 "경제전망이나 통화정책을 수행할 때 유로 사태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로 인식해야 한다"고 훈수를 두기도 했다. 한은의 경기전망이 해외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오류투성이라고 정면 비판한 것이다.
다른 금통위원도 "유로 지역 재정위기 심화, 중국의 성장세 둔화 등으로 향후 성장경로의 불확실성이 크게 확대됐다"면서 "불확실성 증대에 따른 경제심리 변화가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세밀하게 점검해 경제전망 때 반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은의 물가지표가 '체감'경기와 괴리되면서 통화정책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개혁을 명분으로 한 '친정체제' 강화…공포에 떠는 한은 직원들=김 총재가 2월 말 한은을 통째로 개혁하겠다면서 단행한 고위급 인사. 한은 직원의 경쟁력을 키우고, '늙은 조직'을 젊게 하기 위한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한은 내부에서는 파격이라는 평가보다 김 총재의 친정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더 많았다. 철밥통 조직을 깨뜨리는 과도기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김 총재의 인사는 한은 내부의 소통 문제를 오히려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연이어 터진 '직원 사찰' 논란을 두고 한은 내부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많다. 직원 사찰 논란은 한 지역본부장의 인사에 대해 불만을 품은 직원들이 내부 익명게시판에 해당 본부장을 폄하하는 글을 올린 게 발단이 됐다. 한은은 이 직원에 대한 처벌 가능 여부를 법무법인에 질의하는 과정에서 한은 총재에 대한 비난글을 하나의 사례로 들었고 이것이 외부로 유출되면서 사찰 논란이 일어난 것이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직원들 간 문제를 집행부가 나서 법무법인에 법률자문을 의뢰한 것은 대응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며 "여기에 평소 김 총재의 일방통행식 개혁에 대해 쌓였던 직원들의 불신이 터지면서 사찰 논란까지 번지게 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은 관계자는 "김 총재 취임 이후 급격한 조직개편과 측근 중심의 일방적인 인사가 일상화되면서 직원들의 눈치보기가 극심해지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