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디자인전문기업 A사는 모 기업이 진행한 디자인 사업 외주 입찰에 참여했다가 억울한 상황에 빠졌다. 최종적으로 '탈락' 판정을 받아 마음을 비워두고 있었지만 이후 해당 기업이 출시한 제품 디자인을 보니 입찰참여 때 제출했던 시안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다. '무단으로 도용한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A사는 해당 기업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디자인업체들이 일반 기업의 디자인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공정거래로 신음하고 있다. 지식재산권 침해 뿐 아니라 일방적인 계약 해지나 과도한 업무 지시 등으로 영세 기업의 경우 생존이 위태로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피해유형과 현황은=17일 한국디자인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7월 설립한 디자인기업피해신고센터를 통해 작년 11월부터 현재까지 50여 디자인 전문회사를 대상으로 피해 사례를 접수한 결과 응답기업의 78%가 불공정거래로 인한 피해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분쟁 대상은 대기업이 42%, 중소기업이 40%로, 그 결과 기업당 연평균 2~3건, 연간 2,000만~1억원(53%)에 달하는 피해를 입은 것으로 조사됐다.
피해 유형은 다양하다. 경쟁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 제출한 디자인 시안을 의뢰 기업이 비용 지불없이 도용하거나 의뢰받은 디자인 프로젝트 자체가 공중분해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경우 피해 기업들에게는 시안 제작을 위해 투입한 인건비 등이 고스란히 손해로 돌아오게 된다.
특히 대기업은 계약서상의 '독소조항'으로 디자인 기업들의 목을 죄고 있다.
갑(의뢰 기업)의 사정으로 당초 제출 기일보다 작업기간이 길어졌을 경우에도 추가되는 비용 부담은 을(디자인 기업)이 고스란히 져야 하는 조항 때문에 일부 영세 기업의 경우 프로젝트 완료 후 도산하는 경우도 많다.
이밖에 결과에 대한 불만족을 이유로 일체의 대금 지불을 거부하거나 추가 비용 지출 없이 디자인 시안에 대해 끊임없는 수정을 요구하는 사례도 지적됐다.
◇'일감 끊길라'피해대응 못하는 기업들=디자인기업들은 이 같은 불공정 거래에 신음하면서도 일감이 끊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피해를 당해도 대응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센터 조사에서 피해 기업 중 31%는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를 고려해 피해를 감수한다'고 대답했다.
분쟁 대응에 나서도 이를 뒷받침할만한 여력이 없는 것도 문제다.
한국디자인진흥원에 따르면 디자인전문회사로 신고돼 있는 업체는 지난해 말 기준 3,061개로 이중 56%가 종업원 10명 미만이다. 연평균 매출액은 10억~30억원 미만이 27.08%로 가장 많고 3억원 미만 기업도 18.95%에 달한다.
지재권 침해 문제도 마찬가지다. 김성천 디자인기업협회장은 "의장 등록 등 시안 제출 전에 권리 방어를 할 수도 있지만 꾸준히 비용이 드는 부분이라 영세한 디자인 기업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또한 해외의 경우 입찰에 떨어진 기업에 대해 시안 준비 기간에 투입된 인력 등의 비용을 최소한으로 보장해주는 '리젝트 피(reject fee)'를 제공하는데 국내에서는 이런 부분이 전무하다는 것도 지적된다.
◇불공정거래 근절 노력은=협회는 오는 2월까지 총 200여 디자인 전문회사까지 대상을 확대해 피해사례 조사를 완료하고 이를 바탕으로 표준약관 제정 등의 움직임에 나설 방침이다. 정종원 신고센터장은 "향후 기업 분쟁시 법률자문을 포함한 전방위적인 지원에 착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불공정거래 근절을 위해 법 체제를 정비하는 노력도 진행 중이다.
지난해 11월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소속인 배은희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발의해 현재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소위에 계류중인 '산업디자인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그것이다. 법률안에는 지식경제부 장관이 산업디자인사업의 거래실태 등의 분석을 통해 건전한 거래질서를 확립한다는 내용이 포함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