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CEO&Story]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게임은 영화나 뮤지컬 같은 종합예술로 탈바꿈할 것”

지난 29일 오후 서울 역삼동 엑스엘게임즈 사무실. 게임을 개발하는 직원들로 한창 북적여야 할 시간이었지만 텅 빈 책상과 PC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리 곳곳에는 게임 캐릭터와 무기를 그린 종이가 눈에 띄었다. 한쪽 벽에는 큰 글씨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문구가 적힌 액자가 붙어 있었다. 사무실에 남아 있는 몇몇 직원들은 모니터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300억원이 넘게 투입된 게임의 산실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엉뚱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더벅머리에 수염을 기른 채 나타난 송재경(46ㆍ사진) 엑스엘게임즈 대표는 “얼마 전 ‘아키에이지’ 4차 CBT(시범 서비스)가 끝나서 직원들을 워크숍에 보냈다”며 “일 할 때는 열심히 하고 쉴 때는 제대로 쉬는 게 우리 회사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던 소년은 게임을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어른들은 ‘애들이나 하는 오락’이라고 했지만 소년에게 게임은 ‘세상의 전부’였다. 게임 속 캐릭터을 조종해 아이템을 모으고 임무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것은 세상 어떤 일보다 신나고 달콤했다. 게임은 분명 현실과 달랐지만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재미와 성취감이 있었다. 게임은 평범한 현실을 잊게 하는 동굴이자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화수분이었다.


소년은 공부를 잘 해야 게임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도 일찌감치 깨달았다. 대학에 가서도 게임을 향한 탐닉은 계속됐다. 앞날에 대한 걱정이 커져갈수록 게임에 대한 애정은 덩달아 늘어났다. 남이 만든 게임을 하다 보니 직접 게임을 만들어야겠다는 욕심도 생겼다. 세계 최초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를 만들었고 이어‘리니지’도 내놨다. 소년의 손을 거쳐 나온 게임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어느새 ‘천재 개발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어른이 된 소년은 지금도 게임을 만든다. 대표이사라는 직함도 생겼다. 넥슨과 엔씨소프트를 거쳐 지난 2003년 그가 직접 세운 회사다. 내년이면 창립 10주년이 되지만 사람들은 엑스엘게임즈보다 송재경을 기억한다. 흔히 이야기하는 ‘대박 게임’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 개발 중인 ‘아키에이지(Archeage)’는 사실상 엑스엘게임즈의 첫 작품이다. 송 대표는 “멋진 게임을 기대해도 좋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이르면 올 하반기 출시를 목표로 열심히 개발하고 있습니다. 개발비용이 많이 들었죠. 이미 300억원이 넘게 투입됐고 출시 무렵에는 400억원을 넘을 것 같습니다. 출시시기가 늦어지면서 아키에이지와 관련된 소문도 많은데 기대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송 대표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낮과 밤이 뒤바뀌고 출퇴근이 자유롭던 개발자 시절이 그립지만 대표라는 책임감을 여실히 체험하고 있다. 수시로 있는 채용면접도 중요한 일 중 하나다.

“평소에는 보통 오전 11시쯤 출근해 임직원 회의를 하는데 회의가 없을 때는 늦게 오기도 합니다. 점심을 먹고 또 회의를 갖고 직원 채용면접을 봅니다. 저녁을 먹고는 코딩(프로그램을 짜는 것)을 잠깐 보고 퇴근을 합니다. 젊었을 때는 종종 사무실에서 자거나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허리가 아파서 집에는 꼭 들어갑니다. 대신 직원들은 팀별로 비교적 자유롭게 출퇴근을 합니다.”


엑스엘게임즈는 정년이 65세다. 벤처기업은 물론 일반기업과 비교해도 이례적으로 길다. 현재 임직원 350여명의 평균연령은 30대 중반이지만 장수하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송 대표의 뜻이 담겼다. 그만큼 들어가기도 까다롭다. 하지만 퇴사 후 다시 입사하기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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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을 뽑을 때 이력서에 토익 점수가 있으면 왜 시험을 봤는지 꼭 물어봅니다. 아무런 목적없이 시험을 봤다거나 설득력 없는 답변을 내놓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 회사는 마지막에 프로그램 실기시험도 치릅니다. 저와 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로그램을 짜는 건데 긴장된 상황에서도 얼마나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판단합니다. 회사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직원은 일단 환영합니다. 고생을 해봤으니 묵묵히 일을 잘하거든요. 어렸을 때 창업했다가 실패를 겪은 친구들도 선호합니다.”

송 대표는 게임의 미래에 대해서도 낙관한다. 게임 산업이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더욱 성장할 여지가 많다는 설명이다. 그는 게임이 영화나 뮤지컬 같은 종합 예술로 탈바꿈하는 날도 머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앞으로는 영화 ‘매트릭스’와 같은 가상현실 기반의 게임이 주류를 이룰 겁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데 모바일 게임은 지금이 시작입니다. 앞으로는 모든 휴대폰이 스마트폰으로 바뀔 텐데 이는 모든 사람들이 게임기를 하나씩 가지고 다닌다는 의미입니다. 앞으로 게임은 자연스럽게 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을 것입니다.”

게임 진흥과 게임 규제는 양날의 칼이다. 정책적으로는 게임산업을 육성해야 하지만 게임 과몰입과 중독은 넘어야 할 산이다. 이미 정부는 심야시간에 청소년의 게임 접속을 차단하는 ‘셧다운제도’를 시행 중이고 일정시간 이상 게임을 금지하는 ‘쿨링오프제도’도 검토하고 있다. 게임 업계는 규제로 일관된 정부 정책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송 대표는 게임산업 규제를 둘러싼 논란은 원인과 증상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의학 드라마 ‘하우스’를 보면 진단의학과가 나옵니다. 병원에 찾아온 환자의 증상을 보고 어떤 병인지 파악하는 게 주된 일인데 때로는 병명을 몰라 환자가 죽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의 정부 정책은 증상만 일단 완화시키겠다는 겁니다. 암 환자한테 모르핀 주사를 주는 식입니다.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을 수는 있어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송 대표는 게임의 부작용을 줄이려면 정부가 복지예산을 늘려 다양한 복지정책을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사회의 복지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개선되면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게임 중독에 빠지는 비중도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얘기다.

“게임 부작용은 가정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부모가 일하느라 아이들을 방치하면 게임에 빠질 확률이 높습니다. 야근 없이 제 시간에 퇴근하는 게 그래서 중요합니다. 물론 게임 업계도 노력해야 합니다. 사회적인 기금을 조정하거나 게임중독치료센터도 방안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교육용 게임이나 기능성 게임이 많이 등장해 게임의 긍정적인 요소를 극대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송 대표는 미래의 게임 개발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직접 송 대표에게 질문하는 학생들도 많다. 하지만 대부분은 무작정 게임을 많이 하고 싶어서 게임 개발자가 되고 싶다는 질문이 대부분이다.

“게임만 열심히 해서는 게임 개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게임 밖의 다른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폭 넓은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최소한 고등학교 기본 교육과정은 지식으로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대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해보다가 안 되면 다른 일을 찾는 것도 방법입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오랜 기간 장수하는 게임을 만들겠다는 열정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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