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1월 22일] 더불어 살기

경제가 길고 깊은 불황의 수렁에 빠져들면서 실직공포가 커지고 한동안 주춤하던 명예퇴직이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아직도 정년이 남은 직장인들이 자발적으로 퇴직을 신청하면 남은 정년 기간 동안의 월급에다 위로금까지 얹어주는 방식이다. 강제성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퇴직자의 입장에서 금전적으로 별 손해가 없고 회사로서는 큰 마찰 없이 감원을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퇴직자로서는 후배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명분도 있다. 그런데 목돈을 쥐고 직장을 떠난 명퇴자들의 대부분이 얼마 안 있어 후회하게 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월급쟁이치고 불평불만 없는 사람이 별로 없고 제법 큰 자금으로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면 만족도가 훨씬 높아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직장 또는 일자리라는 것은 단순히 노동력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자리는 최선의 복지이자 자기실현의 기회라는 말도 이런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노동의 종말’보다 암울한 현실 문제는 이처럼 소중한 일자리가 추가로 창출되기는커녕 있던 일자리마저 줄어드는 ‘일자리의 위기’가 현실로 닥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충격이 실물경제를 강타하면서 전세계가 실업대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고 있다. 미국의 경우 금융ㆍ제조업 가릴 것 없이 수천명에서 많게는 수만명에 달하는 대량 감원소식이 거의 매일 전해진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11월 총취업자 수가 2만5000명이나 줄어든 것으로 조사돼 결국 마이너스 고용이 현실이 됐다. 더 암담한 것은 실업대란이 이제 시작에 불과하고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점이다. 며칠 전 한국노동연구원은 올해 우리 경제가 1% 정도 성장할 경우 실업자 수는 170만명에 이른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일자리의 위기가 예고 없이 하루아침에 닥친 것은 아니다. ‘정보화와 로봇과 같은 지능기계의 발달, 경영혁신 등으로 근로자들이 생산과정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암울한 경고를 담은 제레미 레프킨의 ‘노동의 종말’이 나온 지도 15년이 흘렀다. 기술발달의 혜택으로 인간의 행복도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개미사회처럼 20% 정도만이 가치 있는 일을 하고 나머지 80%는 허드렛일을 하게 됨으로써 삶의 질은 오히려 떨어지는 ‘20:80의 사회’ 전망은 한동안 미국의 신경제와 세계경제의 호황에 가려 빛을 잃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 1930년대 대공황 못지않은 경제적 재앙이 닥치면서 허드렛일자리조차 마음대로 구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밀어닥치고 있다. 지속가능 사회 위한 합의 절실 이쯤되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가령 노동자는 ‘노동의 위기’에는 아랑곳없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계속 임금인상을 위해 투쟁하고 사용자 측은 기회만 되면 근로자를 줄여나가는(일자리를 없애는) ‘마이너스 섬’ 게임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서로 협력하고 일자리를 지키고 기업을 발전시켜 더 많은 사람들과 일자리를 나눠가지는 안정사회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당연히 후자여야 한다. 전자의 경우 종착지는 열 사람이 100개를 생산하던 것을 한 사람이 100개를 생산하고 나머지 9사람에게 실업수당을 주는 지속 불가능한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자리의 위기’는 나만 더 가지면 아무래도 좋다는 이기적 선택의 위험성에 대한 심각한 경고와 같다. 일자리 나누기든, 쪼개기든, 급여삭감이든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한 진지한 고민과 합의를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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