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16일에는 현대자동차 노조원 23명이 상여금과 휴가비 등 6개 항목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해달라며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한 소송의 선고가 나올 예정이다. 이들 23명은 노사합의를 통해 선발된 직급별 대표로 승소하면 현대차 조합원 4만7,000명에게 같은 효력이 미치게 된다. 국내 최대 단일사업장인 현대차의 통상임금 판결은 경영계와 노동계 모두에 큰 파장을 미칠 것으로 예상돼 법원은 신중을 기해왔다.
지난 2013년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통상임금 판결 이후 고용노동부가 노사지도지침을 내놓았지만 개별 기업마다 이와 관련한 소송은 이어지고 있다.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따르면 지난 한해 동안 접수된 통상임금 관련 소송만도 200여건에 달한다. 노조 단위의 대표 소송에다 개인별 소송까지 무차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범위를 서울 외에 전국으로 확대하면 관련 소송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율적인 노사대화는 사라지고 사법부의 판단을 통해 사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른바 '사법화 증후군'이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기존의 노동관행과 판례, 정부의 행정해석지침을 뒤집는 판결이 나오면서 그동안 바탕에 깔려 있던 노사 간 신뢰가 약해진 데 있다. 더욱이 노조 측에서는 임금협상 과정에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실제 통상임금 범위 확대를 주된 이슈로 내걸어 단체교섭이 파행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발생했다. 노사 간 분쟁을 해소하는 최종적 수단이라는 법원 판결이 갖고 있던 본래 의미는 퇴색된 지 오래다.
박지순 고려대 교수는 "헌법 33조에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명시한 데는 일반적 근로조건은 노사자치로 결정하라는 기본전제가 깔려 있다"며 "노사가 오랜 역사를 갖고 형성해놓은 약속과 관행을 사법부가 무효화한다면 결국 노사자율 영역은 존재할 수 없고 사회에 엄청난 불안요소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통상임금 성립요건으로 정기성과 일률성·고정성 등 세 가지를 제시했다. 그렇지만 고정성과 신의칙 적용(소급지급) 등 해석이 불명확한 부분으로 인해 논란이 정리되기는커녕 새로운 분쟁을 유발하게 됐다. 개별 기업마다 임금체계와 수당 등 임금을 구성하고 있는 요건이 제각각이어서 통상임금의 범위와 소급적용 여부에 대해서는 재판부마다 엇갈린 판결을 내리는 상황이다.
게다가 1심 판결에 대해 노사 중 한쪽이 이를 수용하지 않고 항소하게 되면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시간과 비용이 늘어나는 등 상당한 소모전만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이미 르노삼성자동차는 1심 판결을 수용하지 않고 항소했다. 부산지법은 지난해 10월 르노삼성 직원 170명이 제기한 임금소송에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법정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며 근로자의 손을 들어줬다.
이처럼 사법화 증후군이 강해질수록 노사교섭의 힘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기업과 노조 모두 결국 법으로 결론이 날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 이해관계를 자체적으로 조정하려는 노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추가적인 인건비 부담은 물론이고 노사갈등 비용도 매우 크다. 해고나 근로자성에 대한 부분이 아닌 임금 문제는 충분히 노사가 풀어낼 수 있다. 특히 통상임금 이슈는 중견기업과 대기업 정규직 근로조건 개선에만 편중돼 노동시장 격차를 확대시킬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법원의 판결은 차선으로 삼고 노사가 연대정신을 발휘해 자율적으로 갈등해소를 시도하는 방향으로 노사관계 문화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조준모 성균관대 교수는 "통상임금 문제는 일본 히로시마철도가 2010년 임금양보교섭과 절약된 인건비로 계약직의 정규직화를 타협한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단지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의 임금인상만이 아닌 사업장 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신규 고용창출을 위한 노사 협치 노력이 요구된다는 얘기다.
근로기준법에 정기성·일률성·고정성에 대한 요건을 명시하는 식으로 통상임금의 기준과 범위를 명확히 해 모호함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입법 정비가 매우 시급하다는 얘기다. 대법원 판결 이후 정부의 안일한 대응도 갈등과 반목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다른 측면에서는 노사관계 개선을 위해 2년에 불과한 단체협약 적용기간을 늘리는 방안도 대안으로 제시된다. 단협에 대한 의미를 높이고 불필요한 소모전을 줄이기 위함이다.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는 "미국은 노조마다 각기 다른데 자동차 업계는 4년으로, 통신업종은 최장 8년까지 잡을 정도로 단협 적용기간이 늘어나는 추세"라며 "단협 적용기간을 늘리면 노사 모두 교섭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