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외환위기를 겪은사람들] 김중수 <당시 OECD 가입준비사무소장>

"잠재성장률 저하 가볍게 봐선 안돼"<br>부실한 금융감독 기능이 換亂 불러<br>'OECD 가입=대선用' 주장은 억지



[외환위기를 겪은사람들] 김중수 "잠재성장률 저하 가볍게 봐선 안돼"부실한 금융감독 기능이 換亂 불러'OECD 가입=대선用' 주장은 억지 이종배기자 ljb@sed.co.kr 이재철기자 humming@sed.co.kr 사진= 김동호기자 관련기사 • 김용환 "DJ '換亂극복' 선언 왜 서둘렀는지…" • 김중수 "잠재성장률 저하 가볍게 봐선 안돼" • 최종욱 "제역할 못한 정부·은행·기업 '합작품'" • 유종근 "DJ불신에 美와 외채협상 제일 힘들어" • 이연수 "정부 '하이닉스 무조건 팔아라' 독려" • 정덕구 "대선 휘말려 신종 경제위기 올까 걱정" • 위성복 "기업 사정 모른채 구조조정 밀어붙여" • 손병두 "대우그룹 몰락, 정부도 일부 책임있다" • 김대송 "증권사 무분별 해외진출 리스크 크다" • 이용득 "관치금융이 환란 부른 결정적 요인" • 강봉균 "대우, 구조조정 서둘렀으면 해체 안돼" “10년전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는 것을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 (잠재)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발버둥이라도 쳐야 한다.” 96년 당시 OECD 가입준비사무소장을 재직했던 김중수 경희대 아태국제대학원 교수는 외환위기를 되새김질 하면서 현 한국경제에 대한 고언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그는 또 ‘‘OECD 가입이 혹시 외환위기의 한 원인이 된 게 아니냐’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정치적 쇼 때문에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OECD 가입은 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92-~96년)에서 이미 확정됐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7차계획이 폐기되고 신경제 5개년계획(92~97년)이 수립됐는데, 그 때 다시 가입방침이 정해졌다. 일류클럽(OECD)은 우리 의지로 쉽게 못 들어가는 데 왜 (정치적 쇼 때문에 가입했다는 식의) 논리가 진행되는지 (지금도) 아쉽다.” 외환위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던 97년에는 경제부총리 특별보좌관으로도 일했던 김 교수는 한국경제를 ‘선진국 클럽’에 가입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현장에서 겪은 탓인지 그 때의 충격이 지금도 그의 기억 속에서 날짜 별로 생생히 살아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는 “정부의 금융감독 기능만 제대로 작동했었더라면 (IMF) 구제금융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못내 아쉬워하며 “자본시장 자율화 이후 부실하기만 했던 정부의 금융감독 감시 기능이 환란을 불러온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지목했다. 2002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주도적으로 잠재성장률 전망(03~12년)을 만들기도 했던 그는 “현 정부가 IMF 이후 떨어지고 있는 경제성장률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우려도 빠트리지 않았다. -97년 외환위기가 왜 왔다고 보는가. ▦그 요인을 딱 한가지만으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 경제가 글로벌 경제에 유연히 대처하지 못한 탓이 크다. 먼저 금융자율화와 자본자율화를 구분할 필요가 있었는데 우리 금융산업은 굉장히 낙후된 게 사실 아닌가. (당시 우리는) 영어로 말하자면 금융은 “섬씽 스페셜’(something special)”이라며, 보호를 기본으로 생각했다. (금융산업은)일체 개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본을 자율화하니 기업들은 (정부) 몰래 돈을 끌어다 쓰느라 바빴다. 그렇다고 쳐도 사후감독이라도 확실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우리(정부)는 간섭과 규제는 잘 해도 사후 감독은 잘 못하지 않나. 97년 3월에 부총리 특보로 재경원에 들어와서 과연 기업들이 어떻게 돈을 빌리는 지 알고 싶어 자료를 찾았다. 그런데 이미 (자본시장이) 자율화된 데다 감독기능이 부실해 기업들이 어떻게 돈을 빌리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강경식 전 부총리가 ‘금융개혁법’을 통해 금융산업 개혁에 신경을 많이 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관련 법령이 12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사소한 10개만 통과되고 중요한 2개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바로 중앙은행법과 금융감독법이다. 당시 정치인들이 왜 이 법안 통과를 반대했는지 모르겠다. 언론이 지금이라도 해당 국회의원들을 질타해야 할 일이다. 이 법안들 통과됐으면 외환위기 겪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부가 IMF 고금리를 받아들여 더욱 혹독한 어려움을 겪게 됐는데… ▦고금리를 탓하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더니 나중에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똑같다. 고금리가 좋지 않다는 건 잘 안다. 내가 IMF를 방어할 이유는 없지만 수술은 환자 체력부터 보강하고 한다. 지난 20~30년 간 외환위기가 100여건 정도 터졌는데 대부분의 경우 과도한 정부부채로 발생한 게 많아 IMF처방이 그런 경험에 맞춰 정형화된 경우가 많았다. (방만한 국가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긴축이 불가피했다는 애기이다. 이자를 높여야 내부적으로 국민들이 돈을 은행에 넣고 외자가 국내에 유입되지 않겠나. IMF는 안정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아시아 경제위기는 (남미와는 달리) 굉장히 특이하게 튀어나왔지만. -96년 정부가 OECD 가입 조건으로 단기자본시장을 열어 단기차입 증가 등 외환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있다. ▦단기자본시장은 이미 열려 있는 상태였다. 한보도 마찬가지고 재계 기업들은 단기자본시장 이자가 가장 싸니까 단기자본을 빌렸다. 롤오버(만기 연장)만 하면 됐다. 근데 위기가 생겨 롤오버가 안 된 것이다. 기업들도 설마 위기가 올까 했겠지. OECD 가입하기 위해 (정부가)무리하게 단기자본시장을 개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협상에서도 (관련 조항을) 대부분 유보시켰다. - OECD 가입 목적이 ‘국제화’라는 순수한 목적이었는데, 당시 대선을 겨냥한 정치적 이유로 가입목적이 변질된 거 아니었나. ▦정치적 쇼를 하기 위해 OECD에 들어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당시 타이밍이 선거(97년 대통령선거)와 맞물리기는 했다. 가입 국회 비준이 96년 11월에 있었다. 당시 야당인 평민당과 자민련 의원들이 YS의 선거 전략이 아니냐는 질문을 굉장히 많이 했다. OECD 가입은 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92-~96년)에서 이미 확정됐다.(정부는 당시 계획에서 OECD 가입방침을 최초로 공식화함)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7차계획이 폐기되고 신경제 5개년계획(92~97년)에서 다시 (가입방침이)이 전망됐다. 일류클럽(OECD)은 우리 의지로 쉽게 못 들어가는 데 왜 논리가 이렇게 진행되는지… -구제금융 협상 당시에는 향후 발생한 상황은 예상하지 못하고 단순히 금융시장 안정용 자금을 빌리는 차원이었다는 주장(강 전 부총리)도 있다. ▦그렇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감독 기구가 많이 개선됐다고 보는지. ▦성패는 단 하나에 달렸다. 인재를 뽑는 거다. 지금의 금융감독 기구는 기존 인력들을 다 모아 놓았는데…. 사전규제 한다고 하면 우수한 사람들이 많이 오지만 사후감독 한다고 하면 오는 사람이 없는 것도 문제이다. 민간과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을 뽑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 사람들에게는 인센티브를 많이 줘야 한다. 이 때문에 애초부터 금융감독 기구의 공적기구화에 반대했다. 공적기구는 임금을 많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공적기구로 있어야 권한이 생기는 건 사실이지만 내가 관심이 가는 쪽은 ‘사람’이다. 10만불짜리(정부)가 절대 100만불짜리(민간) 못 이긴다. -OECD 가입은 선진국이라는 큰 꿈을 본건데, 지금 대한민국은 어느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하나. ▦그 당시나 지금이나 세계 속 우리는 위치가 비슷하다. 문제는 잠재성장률이다. 현 한국경제를 심각하게 보지 않는 건 정말 큰 문제다. 성장론자는 아니지만 잠재성장력을 중장기적으로 확보하지 못하면 큰일난다. 정부가 목표로 하고 있는 잠재성장률 5%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지난 4~5년간 제대로 5%를 넘은 적이 없다. 나쁘게 말해 잠재성장률이 5%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마지막까지 발버둥 쳐야 한다. ◇약력 ▦경기고ㆍ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73년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원 ▦79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교수 ▦83년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93년 대통령 경제비서관 ▦95년 주 프랑스 공사 ▦96년 OECD가입준비사무소장 ▦97년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 특보 ▦97∼98년 한국조세연구원 원장 ▦02∼05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05년 경희대 아태국제대학원 교수(현) ● 아직도 끝나지 않은 'OECD가입 원죄론' 한국보다도 소득 낮은 폴란드·헝가리도 가입…당시 자격요건은 충분 외환위기 평가 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이 1996년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이다. 논란의 한 중심에는 OECD가 97년 위기를 초래한 주 원인이라는 주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강경식 전 부총리는 이에 대해 "당초 OECD 가입에 주력했던 이유는 선진국 대열 합류가 아니고 앞선 정보 등을 얻기 위해서"라며 "아울러 가입을 계기로 금융개혁 등 구조조정을 촉진시키려는 계획이었는 데 이것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OECD 가입에 따른 어설픈 시장개방으로 서비스 수지 적자 규모 확대, 외국자본의 국내시장 장악 등 여러 가지 부정적인 영향을 한국 경제에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 규모에 걸 맞지 않게 빠르게 OECD에 가입하면서 자본ㆍ금융시장을 급속하게 열었고, 국민들로 하여금 선진국 병에 걸리게 끔 만들었다는 애기이다. 반대의 목소리는 당시에서 컸다. 96년 재경원 국정감사에서 박명환 의원(신한국당)은 "급작스런 자본·외환시장 개방으로 우리 경제는 자칫 멕시코 페소화 폭락과 같은 위기상황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면서 "무리하게 가입을 추진하기보다 국민과 기업이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상현·김민석 의원(국민회의)도 "낙후된 금융 현실을 감안할 때 OECD가입이후 국내 금융기관중 상당수는 도산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OECD 가입을 3∼5년간 유예하거나 가입유보의 구국적 결단을 내려라"고 당시 한승수 경제 부총리를 몰아세우는 장면도 연출됐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OECD가입이후의 경제운영 상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조선소를 지으면서 배를 만들어 파는 형국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렇다면 OECD가는 과연 명실상부한 선진국 클럽이었을까. 재정경제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96년 가입 당시 OECD 성격은 이미 선진국 클럽의 굴레를 넘어 중진국으로까지 확대되는 시기였다"며 "그 때 우리나라와 함께 가입한 나라가 폴란드, 헝가리 등이었는 데 이들은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낮은 나라였다"고 말했다. OECD가 문호를 확대하면서 우리나라와 같은 중진국 그릅도 대거 가입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YS정부는 OECD 가입은 곧 '선진국행'이라는 선전을 날이면 날마다 떠들어대고 있었다. OECD 가입으로 IMF 위기가 왔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정치권에서 이를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다 보니 우리 경제에 여러 가지 부담을 준 것 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반론의 목소리도 크다. OECD 가입 당시 대책반을 이끌었던 김중수 전 한국개발연구원 원장은 "OECD가 과도하게 (한국에) 시장개방을 요구하지 않았다. 특히 단기채 시장 개방은 전에부터 열러 있었던 것이다"고 말했다. 일각에서 단기채 시장만 열고 장기채 시장은 묶어 외자 차입구조가 왜곡됐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국내 장기채 시장은 내외간 금리차로 열 수 없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경식 전 한은총재는 "가입할 수 있었는데도 가입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욕을 얻어 먹었을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OECD 가입을 논의한 80~90년대 초반에는 그 당시 경제기획원이 주도 했지만, 실제 협상 과정은 재정경제원(1994년 기획원과 재무부의 통합)이 생기면서 옛 재무부 라인이 이끌었다. 가입 당시 협상 라인에서 배제됐던 옛 기획원 출신들은 당연히 여러 가지 불만을 쏟아냈다. 재무부 라인 인사들이 큰 틀을 보지 못하고 지엽적인 시각을 갖고 협상을 이끌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입력시간 : 2006/12/2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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