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0월4일] <1207> 파양호 대전


1363년 9월4일, 중국 장시성(江西省) 북부 파양호(鄱陽湖). 서울특별시 면적보다 약 82배 큰 거대한 호수인 이곳에서 한달 넘게 싸워온 주원장과 진우량의 수전(水戰)이 막을 내렸다. 결과는 20만명의 병력으로 65만명과 맞섰던 주원장의 압승. 진우량의 군대는 대부분 물고기 밥이 됐다. 주원장은 이 싸움의 승리를 기반으로 군웅이 할거하던 원나라 말기의 혼란을 진정시킬 지도자로 떠올랐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해전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동원(양측 합계 85만명)된 파양호 전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펼쳐졌다. 소형 선박 위주였던 주원장의 수군을 단번에 깨뜨리기 위해 진우량은 대형 전선을 쇠사슬로 연결해 풍랑에도 거뜬한 선단을 꾸렸다. 누가 봐도 열세임이 분명한 상황에서 주원장은 화공(火攻)을 결정하고 바람의 방향까지 미리 알아내 기적적인 승리를 낚아챘다. 연환계(連環計)며 불화살 공격, 풍향 변경 같은 파양호 대전의 순간은 문학작품에 스며들었다. 삼국지연의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적벽대전은 바로 파양호 전투와 나관중의 상상력이 결합해 쓰였다. 파양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지 5년 후인 1368년 주원장은 명(明)나라를 세웠다. 주원장이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금력. 중국 최고의 수상도시로 꼽히는 저우장(周庄)을 건설한 거부 심만삼(沈萬三) 등 강남상인들이 대주는 돈으로 주원장은 네 배가 넘는 적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예병력을 키우고 인재를 모아 천하를 거머쥐었다. 명의 발흥은 조선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조선왕조가 역대 왕조 가운데 가장 힘 없고 사대적이었던 이유도 명과 청의 힘이 워낙 셌던 탓이다. 중원에 강력한 통일정권이 등장할 때마다 한반도는 늘 불안에 떨었던 역사가 되풀이될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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