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포퓰리즘이 국가흥망 가른다] <4> 세대갈등 시달리는 일본

■ 창간기획<br>노인복지에 뭉칫돈… 젊은층은 세부담 허덕… 경제활력 잃어<br>30~40대들 '하루벌이 신세' 전전<br>노인만 지갑 여는 '소비의 덫' 갇혀<br>고령자 표 의식 '해바라기' 정치에<br>증세·복지제도 개혁등 번번이 좌절

일본의 노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도쿄 도시마구의 스가모 상점가에서 고령 소비자들이 가게들을 둘러보며 거닐고 있다.


도쿄 번화가인 신주쿠(新宿)의 다카시마야 백화점 식품매장에는 노인들이 즐겨 찾는 고급 양갱과 외국산 초콜릿 등이 매장 한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백화점은 항상 곱게 차려 입은 노부부로 북적이고 이들은 한 덩어리에 2,000엔을 호가하는 고급 양갱이나 교토(京都)에서 직송된 고가 밑반찬을 주저 없이 사가곤 한다. 세계 최고의 장수 국가 일본에서는 어느 가게나 식당에 들어가도 손님의 상당수가 노년층으로 이뤄져 있다. 지갑을 여는 것도 이들이다. 일본에서는 실버세대를 겨냥해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상품과 서비스를 선보이는 이른바 '스텔스 마케팅(stealth marketing)' 열풍이 뜨겁게 일고 있다. 심지어 가족이 모여 외식을 할 때 70대 부모가 계산하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수십 년간 직장생활을 한 고령층은 연금만으로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한 반면 비정규직 일자리밖에 구하지 못해 사실상 부모의 연금 수입에 의존해 사는 30~40대 자녀는 일본에서 흔한 얘기가 된 지 오래다. 30여년을 금융계에 종사하다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뒤 내년에 은퇴를 앞두고 있다는 70세의 한 노신사는 "기업연금까지 합치면 현재 연간 600만엔(8,400만원 상당)가량을 연금으로 받고 있다"고 했다. 최근 급격한 엔고현상으로 수출경쟁력 약화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은 노년층만 지갑을 여는 만성적인 '소비의 덫'에 갇혀 있다. 젊은이들은 막대한 세금과 연금 부담에 허덕이고 있는데다 그나마 마땅한 일자리도 없어 소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한때 해외여행을 즐기던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 가보는 것은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 미래의 꿈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은 경제성장의 단꿈을 맛보지 못한 채 초식동물로 불리고 있으며 경제 전반의 활력마저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일본은 최근 재정 상태가 나빠지면서 노인 부담을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궤도를 수정해왔지만 여전히 노년층이 최소한의 부담으로 복지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편중돼 있다. 도쿄 롯폰기(六本木)에 위치한 정책연구대학원대학(GRIPs)의 시마자키 겐지(島崎謙治ㆍ56) 교수는 "인구비중도 높지만 고령자는 투표 참여율도 높아 전체 유권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0%를 넘는다"며 "지금 당장 어렵다고 미뤄왔지만 고령층에 치중한 사회보장제도로 발생하는 세대 간 격차는 심각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005년 현재 70세 이상의 고령층은 670만엔의 연금보험료를 낸 것만으로 5,500만엔의 연금을 타게 된다. 낸 돈의 8.3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일본 정부가 재정부담 때문에 해마다 지급되는 연금 증가율을 물가상승률이나 임금증가율 아래로 제한하는 '매크로경제슬라이드' 제도를 도입했지만 물가 하락시에는 연금에 하락률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단서조항을 달아둔 덕분에 지속되는 디플레이션 와중에 이 제도는 오히려 노년층의 연금소득을 보장해주는 방패막이가 돼주고 있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젊은 세대의 몫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후생노동성 조사에서는 당시 20세 미만, 1985년 이후 출생자는 연금보험료 납부액의 2.3배만 연금으로 지급 받게 된다고 분석됐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당시 현역 근로자들은 경기침체로 평균 4% 임금이 깎인 반면 고령층은 '슬라이드' 제도 덕분에 예전과 똑같은 연금을 받았다. 적은 '부담'으로 많은 '급부'를 누리는 고령자가 갈수록 늘어나는 상황에서 고령자의 표를 의식한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일본의 재정은 악화하고 세대 간 갈등도 심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 있다. 가쿠 가게히데(賀來景英) 도요대 교수는 "일본의 경제를 지금과 같은 상황으로 내몬 최악의 정책은 바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라면서 "선거에 대한 부담 때문에 증세와 사회복지 개혁 등 해야 할 일을 20년 동안 미뤄온 것이 최악의 포퓰리즘"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일본의 20~30대 지방자치단체 의원 및 연구원으로 구성된 '젊은이ㆍ정권공약책정위원회'는 젊은 세대의 시각으로 본 참의원 공약 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이들이 각 정당의 공약 가운데 가장 높이 평가한 정책은 다름아닌 소비세 증세다. 젊은층부터 노년층까지 공평하게 부담을 늘릴 수 있는 소비세율을 높이는 것이 세대 간 격차를 해소하면서 재원을 확충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기업도 고령층의 부담을 늘리자는 주장에 동참하고 있다. 최근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은 정부의 사회보장 및 세제개혁과 관련해 공적연금 지급개시 시기를 늦추고 고령자의료보장제도에 대한 세금 투입비중을 확대할 것을 촉구했다. 게이단렌은 앞서 올 초에도 소비세를 우선 10%로 올린 뒤 단계적으로 10%대 후반까지 올리는 안을 제시했다. 재정악화로 일본 경제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툭하면 일본 정치판을 뒤흔들고 있는 소비세 논란의 중심에도 노인 유권자들이 자리잡고 있다. 역대 정권이 재정 확충을 위해 소비세 인상 카드를 꺼내 들 때마다 선거에 참패한 것은 고령 유권자의 집단 반발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가쿠 교수는 "늘어나는 고령 유권자 때문에 일본의 정책이 노인층에 후한 것은 사실"이라며 "일각에서는 젊은층에 대해서는 한 명당 투표권 1.5표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사카 이와오(逢板巖) 릿쿄대 미디어사회학과 준교수는 "선거에서 이기려면 노년층에 초점을 둬야 하지만 사회 전체를 생각하면 청년층을 생각해야 한다"며 "지금은 노인의 여유로운 삶을 비정규직 젊은층이 떠받치고 있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 재원 확충을 위해 간 나오토(菅直人) 정권은 최근 현재 5%인 소비세율을 오는 2015년까지 10%까지 인상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조차도 과연 실행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제기한다. 도쿄의 한 20대 직장인은 "젊은이들은 왜 똑같이 일하고도 복지혜택을 적게 받아야 하느냐"며 "소비세를 인상한다고 하지만 과연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고령 유권자를 의식한 정치인들의 '해바라기' 그늘에서 허덕이는 현역 세대의 정치에 대한 불신은 뿌리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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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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