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10월 미국 캘리포니아 보험청은 자동차보험의 신요율 체계를 도입한다. 신요율 체계란 손해보험사들이 자동차보험료를 산출할 때 운전자의 연령이나 사고 유무, 차량 가액 등 기본 요소 외에 16가지의 부수적인 요소를 반영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 부수적인 요소에는 차량의 종류나 차량의 성능, 운전자(기명 피보험자)의 자동차 사용율은 물론 운전자의 학교성적까지 포함됐다. 심지어 지구력이나 금연 여부, 보조 운전자의 특성도 자동차보험료 산출 요소로 채택했다.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타 지역 보다 세분화된 요율 체계지만 외국에서는 자동차보험에 가입할 때 대체로 이렇게 다양한 조건들을 필요로 한다. 계약자의 위험도에 가장 근접한 보험료를 산출하기 위해서다. 위험도가 높다면 보험료가 비쌀 수 밖에 없고, 반대의 경우라면 보험료가 낮아진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자동차보험의 경우 운전자들이 개개인의 특성에 부합하는 보험료를 내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상당수 운전자들이 자신이 내야 할 보험료보다 비싼 보험료를 물고 있다. 이런 기현상은 더 많은 보험료를 부담해야 하는 일부 운전자들이 그 보다 훨씬 싼 보험료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험도가 낮은 운전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운전자들의 보험료를 ‘대신 내 주는’ 기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득로 손해보험협회 자동차보험부장은 “정서적인 반감에서 비롯된 소비자들의 오해 때문에도 합리적인 자동차보험료 산출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들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지난 여름 교통법규 위반자에 대한 자동차보험료 할증 폭 확대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이는 내년 9월부터 음주, 무면허, 뺑소니, 신호위반, 속도위반 등 11개 교통법규 위반자에 대한 보험료 할증 폭을 위반 1건당 10%씩 최대 30%까지 확대한다는 내용이다. 금융당국의 제도 변경안이 발표되자 소비자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손해보험사 이익을 위해 운전자들의 부담을 높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운전자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교통법규 위반자에 대한 보험료 할증이 보험사 수익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교통법규를 많이 위반한 사람들의 보험료가 올라간 만큼 법규를 잘 지키는 운전자들의 보험료는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법규 위반자보다 준수자가 수가 훨씬 많기 때문에 보험료 할인액이 적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 개선안은 반대 여론에 밀려 현재 수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유사한 이유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역별 자동차보험료 차등화다. 보험개발원이 2004회계연도(2004.4~2005.3) 지역별 자동차보험 손해율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전남이 82.9%로 가장 높았다. 충남ㆍ전북도 각 77.9%로 전국 평균치를 웃돌았다. 반면 울산은 60.6%, 제주 61.9%로 상당히 낮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손해율이 높다는 것은 그 지역에서 교통사고가 많이 나고 따라서 보험금 역시 많이 지급된다는 것이고, 손해율이 낮은 지역은 그 반대라는 얘기다. 이렇게 지역에 따라 손해율의 차이가 크다면 해당 지역 운전자들의 보험료에도 차이가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자동차보험에서는 지역별 손해율이 보험료에 반영되지 못한다. 보험료가 인상될 가능성이 높은 지역 지자체들의 반발이 워낙 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별 보험료 차등화가 시행되면 일부 지역 운전자들의 보험료가 오르는 만큼 손해율이 평균 이하인 일부 지역 운전자들의 보험료는 떨어진다. 다시 말해 지금은 손해율이 낮은 지역 계약자들이 비싼 보험료를 부담하고 있는 셈이다. 정중영 동의대 금융보험학과 교수는 “가장 기본적인 지역별 보험료 자유화가 도입되지 않음으로써 손해율이 높은 해당지역 지자체에 사고예방 노력의 단초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며 “또 보험사는 해당지역 계약자에 대한 계약 인수를 기피함에 따라 피해자보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자동차보험료와 관련된 계약자 집단간의 불공평성은 교통사고 유ㆍ무에 따른 보험료 할인에도 존재한다. 처음 자동차보험에 가입한 운전자가 1년 동안 교통사고를 내지 않으면 계약 갱신 때 10%씩(자보 가입 5년차ㆍ6년차는 각 5%씩) 보험요율이 떨어져 100%에 시작한 요율이 최저 40%까지 내려간다. 문제는 이 최저할인율까지 도달하는 기간이 7년으로 짧고 할인폭이 크기 때문에 발생한다. 단기간에 보험료가 너무 많이 인하돼 무사고 요율 40%를 적용 받는 운전자들이 적정한 수준보다 보험료를 덜 내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제 막 자동차보험에 가입한 계약자들은 손해율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더 많은 보험료를 내는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따라써 손보업계에서는 최저할인율 도달기간이 현행 7년에서 10년 이상으로 연장돼야 계약자들의 보험료 수준이 공평해 질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렇게 불합리한 요율로 ‘엉망’이 된 자동차보험료 체계는 어떻게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까. 당장은 보험료 인상 가능성이 높은 일부 계약자들의 불만과 반발이 걱정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동차보험료와 관련된 계약자간의 형평성을 되찾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자동차보험 가격 산출에 손보사의 자율권을 더 많이 부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2001년 자동차보험 가격자유화 이후에도 각종 할인ㆍ할증과 관련된 요율은 금융당국이 특별한 근거 없이 규제하고 있다. 이를 실질적으로 손보사 자율에 맡김으로써 보험료를 정상화시키고 계약자들이 폭 넓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손보사의 한 관계자는 “할인ㆍ할증을 비롯한 각종 요율이 자율화되면 계약자 역시 자신에게 유리한 보험사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비뚤어져 있는 자동차보험도 정상화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