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김병철(30)씨는 매월 25일만 되면 은행 계좌로 급여가 이체되지만 현금을 찾아 쓰는 일은 좀체 없다. 출근길에는 선불식 교통카드를 꺼내 든다. 식사비는 신용카드와 모바일카드, 뱅크월렛카카오에 등록된 뱅크머니 중 하나로 결제한다. 후식은 선불충전한 스타벅스 카드로 해결한다. 결혼식이 있는 날이면 충전해놓은 옐로머니를 수금자 이름과 전화번호 입력만으로 전송한다. 쇼핑은 페이팔 계정을 통해 해외 온라인쇼핑몰에서 직접 구매를 한다. 최근에는 해외 유학 중인 동생에게 수수료 없이 송금하기 위해 비트코인에 손을 대고 있다.
뱅크머니에서 옐로머니, 비트코인 등 실물화폐를 대체하는 신종 화폐가 쏟아지고 있다. 지폐로 된 현금(cash)이 아니라 온라인상 숫자로 기록된 이른바 '데이터머니(data money)'가 우리 생활 전반을 변화시키고 있다. 데이터머니의 홍수 속에 있는 우리는 이미 지갑에 현금을 넣고 다니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크게 불편함을 못 느끼는 환경에 살고 있다.
데이터머니 범람의 중심에는 새로운 지급결제서비스의 등장이 있다. 데이터머니를 다루는 자가 생활상을 변화시킨다는 경험칙 때문일까. 정보기술(IT) 업체부터 제조업체·통신사·금융회사까지 전방위적으로 지급결제시장 선점을 노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유럽·중국·일본처럼 전통적인 의미의 화폐 강국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국경을 뛰어넘는 '데이터머니'의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지급결제를 중심으로 한 '핀테크(fintech·금융과 기술의 합성어)'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라지는 실물화폐, 쏟아지는 신종 화폐=한국조폐공사에 따르면 지난 2007년 25억8,000만장이던 지폐·주화 발급량은 지난해 11억8,000만장으로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2009년 5만원권의 등장으로 발급량이 15억7,000만장으로 급락한 영향도 있지만 최근의 하락세는 실물화폐를 대체하는 신용·체크카드 사용 확대에 기인한 탓이다. 한국은행 본점 맞은편에 위치한 신한카드 본사를 빗대 "서로가 최대의 경쟁자"라는 우스갯소리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무엇보다 거래 형태의 변화가 신종 화폐의 범람을 야기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도심에 위치한 쇼핑몰보다는 집·사무실에 위치한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온라인쇼핑을 즐기고 있다. 지난해 전체 모바일카드 이용금액은 1,910억원, 발급 장수는 1,587만8,000장으로 전체 카드 이용금액 대비 각각 1.1%, 6.5%를 차지했다. 현금에서 카드, 데이터머니로 형태가 변화하고 있는 셈이다. 일례로 백화점·면세점·마트 등 유통계열사를 가지고 있는 롯데카드는 최근 온라인쇼핑몰로 옮겨가는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원클릭간편결제서비스 선제적 도입, 광고·마케팅 활성화 등 전력을 다하고 있다.
아울러 IT·유통회사들도 데이터머니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해 신종 화폐를 양산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카카오는 '뱅크머니'라는 가상화폐를 만들어냈다. 은행 계좌에서 뱅크머니로 이체한 뒤 이 돈을 다른 사람에게 송금하거나 일부 가맹점에서 바코드 결제가 가능하도록 했다. 인터파크는 이름·휴대폰번호만으로 송금 가능한 '옐로머니'를 내놓았다. 옐로페이의 계좌에 옐로머니를 이체해놓으면 연 2%의 이자도 지급된다. 유통업체로는 스타벅스의 선불충전카드가 있다. 스타벅스 매장에서는 결제시 현금을 꺼내는 이보다 선불충전카드를 꺼내 드는 풍경이 익숙할 정도다. 스타벅스코리아에 따르면 전체 매출의 33~40%가 스타벅스 카드로 결제되고 있다.
◇과감한 투자로 '데이터머니' 선두주자 돼야=중국 온라인쇼핑몰 타오바오의 계열사 알리페이는 한국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결제 인프라를 전방위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한국스마트카드와 손잡고 선불형 직불카드 '엠패스(M-Pass)'를 도입하는가 하면 롯데백화점과 같은 대형 유통몰과 세븐일레븐·GS25 등 국내 주요 편의점까지 알리페이로 결제 가능하도록 하는 등 간편결제의 글로벌화를 추구하고 있다.
물론 알리페이는 현재 국내에서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하고 있다. 하지만 설치된 결제 인프라를 국내 고객에게 적용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설명이다. 타오바오 쇼핑몰의 직구가 입소문을 타고 있는 부분도 주목할 점이다. 한국인의 알리페이 가입 절차만 단순해진다면 추후 국내 알리페이 가맹점에서 한국 이용자의 결제도 가능해질 수 있다. '외국산' 데이터머니의 유입은 이미 시작됐다는 얘기다.
김종현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알리페이가 가맹점을 확대하는 것은 국내 금융회사로서는 위협적인 요인"이라면서 "일단 인프라가 깔리게 되면 사용자를 중국인에서 한국인으로 전환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말했다.
이 가운데 국내 제조·유통·IT·금융회사 등도 알리페이처럼 지급결제 시장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국경을 넘는 데이터머니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네이버가 데이터머니 국제화에 가장 앞서고 있다. 네이버는 일본에서 '라인페이'를 적극적으로 마케팅하고 있다. 최근에는 포에버21·그루폰 등 온라인 가맹점을 확대하며 사용자 기반을 넓히고 있다.
카카오톡은 지난해 11월 모바일지갑서비스 뱅크월렛카카오를 들고 나오면서 뱅크머니를 탑재했다. 현재까지는 국내에서도 뱅크머니의 확대·보급 속도가 더디지만 해외 월간 이용자 수가 1,083만명인 점에 비춰볼 때 장기적인 안목에서 시도 자체는 의미 있다는 평가다. 연장선상에서 다음카카오는 동남아시아 시장 공략을 위해 인도네시아 점유율 1위 메신저 '패스 클래식'을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안재균 한국씨티은행 디지털뱅킹부 수석은 "각국의 규제상황에 따라 선불카드·간편결제서비스 등의 다양한 형태로 사이버머니를 세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