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사이. 때로는 물과 기름. 물가안정을 중시하는 한국은행, 성장을 중시하는 기획재정부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다. 지난 1997년 한은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맡도록 한은법이 개정된 후 정부와 한은의 관계에 대해 정책 엇박자를 낸다는 말이 꼬리표처럼 붙었다. 그래서 양측 수장이 폭탄주를 마셔가며 회동을 했지만 금방 틀어지기 일쑤였다. 기관의 태생적 한계 탓이다.
실제로 김중수 전임 총재와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6월 서울 명동의 한 곰탕 집에서 첫 회동을 하면서 "수시로 만나겠다"고 다짐했지만 없던 일이 돼버렸다. 두 사람의 회동은 지난해 봄 금리인하를 노골적으로 압박하면서 불거졌던 정책 엇박자를 풀기 위한 과정이었으나 결국 봉합에 그치고 말았다.
2일 이뤄진 이주열 신임 한은 총재와 현 부총리의 전격 회동은 일단 정책공조의 기대감을 갖게 한다. 양측의 만남은 이 총재의 취임식 이후 약 27시간 만에 이뤄진 것. 역대 한은 총재와 기재부 장관의 상견례 사례 중 가장 빠르다. 2005년 3월14일 한덕수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취임 후 사흘 만인 17일 박승 전 한은 총재와 첫 회동을 한 것이나 2009년 2월10일 윤증현 기재부 장관이 취임하고 13일 이성태 전 총재를 만난 것과는 확연히 비교된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재부, 반대로 독립성을 강조하는 한은의 태생적 특성으로 양측의 갈등이 곧 수면 위에 드러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2005년 3월 박승 전 총재와 한덕수 전 장관이 회동한 후 양측은 4월 저녁자리에서 '폭탄주 회동'까지 하며 협력을 강조했지만 같은 해 9월부터 이견을 드러냈다. 그해 9월8일 박 전 총재는 "금리정책에 있어 물가가 가장 중요한 요인임은 틀림없지만 현재 세계적인 저물가는 중국이 값싼 공산품을 공급하는 데 따른 위장된 저물가"라며 "따라서 물가에 맞춰 금리를 조정하면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닷새 후인 13일 한 전 장관은 "한은의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 우선순위는 물가안정"이라고 강하게 맞섰다.
성장 제일주의를 내건 이명박 정부 시절, 양측 관계는 최악이었다. 전임 노무현 대통령에게 임명된 이성태 전 총재는 정부와 여당으로부터 집중 포격을 맞았다. 오죽하면 이성태 총재가 재임기간을 다 채우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왔을 정도다.
2009년 2월 한은에서 만난 이성태 전 총재와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은 한은 15층 간부식당에서 조찬을 함께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과 두 달 후인 4월23일 국회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한은법 개정안을 놓고 돌변했다. 윤 전 장관은 "현 시스템에 특별한 결점이 없고 조사권이 한은에 신설될 경우 중복조사로 금융회사들이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며 한은법 개정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반면 이 전 총재는 "공동검사 시간이 오래 걸리고 금감원의 정보제공 등과 같은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며 맞받아쳤다. 앞서 이명박 정부 초대 기재부 장관이던 강만수 장관 시절에도 양측은 내내 불편했다.
박성욱 금융연구원 거시국제금융연구실장은 "양 기관이 우리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는 큰 목표에서는 공감하나 양측 간 긴장이 없을 수는 없다"며 "현재 양 기관이 처한 상황상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