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인재 허브국가를 만들자] 엔지니어 사회적 대우 높여라

요즘 대학진학을 준비중인 고3 수험생과 학부모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유행한다고 한다. “자꾸 공부하라고 들볶으면 공대나 갈 거예요” 서울대 공대의 한 교수는 최근 지방 중학생으로부터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공대에 가서 첨단 기술을 연구하는 엔지니어가 되는 게 꿈인데요. 부모님은 공대에 가면 비전이 없으니 자꾸 의대 진학을 강조하세요. 공대를 나오면 그렇게 대접을 못 받나요?” 이공계 기피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다. ◇이공계 기피, 바닥이 안 보인다 지난 90년대 중반이후 곪기 시작한 이공계 기피와 이탈 현상은 바닥을 모를 정도로 추락했다. 올초 실시된 서울대 이공계 박사과정 총 77명이 정원이었으나 지원자는 겨우 50명에 불과해 사상 초유의 미달 사태를 빚었다. 언론은 물론이고 학계 등에서 `어찌 이런 일이`라고 떠들썩 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사태다. 대학 진학 때부터 이공계는 찬밥 신세다. 교육인적자원부에 따르면 자연계 수능지원 인원은 지난 96년 35만명에서 2002년에는 20만명 이하로 뚝 떨어졌다. 자연계 지원자 중에서도 우수한 학생들은 공대보다는 의대를 택한다. 취업 걱정이 없는데다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이공계 학생이 의대나 법대로 진학하기 위해 재수를 결심하거나, 고시 등 옆길로 새는 경우는 갈수록 느는 추세다. 일류대 공대생들은 `의(의대)ㆍ치(치대)ㆍ한(한의대)으로 돌아가겠다`고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다. 이공계 인력의 산실인 연구소도 처지는 비슷하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의회가 1,000개 민간기업연구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연구원중 `다시 직업을 선택한다면 연구원의 길을 걷겠다`는 응답이 15.4%에 불과했다. 과학기술분야 연구원 모임인 한국과학기술인연합의 설문에서는 이공계 출신 연구원과 대학원생의 56%가 비이공계로의 전환을 고려한 바 있다. 진대제 삼성전자 사장은 “이공계 기피현상으로 경쟁력이 약화돼 비틀거리고 있는 일본처럼 우리나라도 이공계 인력 양성을 소홀히 하면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공계 홀대가 근본 원인 왜 이렇게 총체적 난국이 빚어졌을까. 가장 큰 원인은 왜곡된 보상체계. 70~80년대 고도성장기에는 최고의 대우를 받던 이공계 인력들의 소득 수준은 외환위기 이후 갈수록 찬밥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의사, 변호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됐으며 최근에는 금융계와의 격차도 점차 벌어지고 있다. 사회적 지위나 인식도 바닥권이다. 상장회사 대표이사 가운데 이공계 출신은 26%에 불과하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두배에 육박하는 45%가 이공계 CEO이다. 또 정책 결정을 담당하는 정부의 3급 이상 고위 공직자 가운데 이공계는 16%에 불과하다. 16대 국회의원 가운데는 8%, 심지어 전문적 지식을 요구받는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 가운데도 11% 만이 이공계를 나왔다. 김은환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사회적 위상이 낮다보니 이공계 인력 사이에 사회발전의 주역이라는 자부심 보다는 평생 힘들게 공부하면서 돈도 못벌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자조적 태도가 확산되고 있다”고 걱정했다. 흥미와 창의성을 중심으로 한 심도있는 교육이 이뤄지지 못한다는 점도 이공계 기피의 또 다른 요인이다. 수학ㆍ과학을 지도할 전문 교육자가 부족한데다 평준화 교육으로 인해 영재 발굴이나 육성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 여기에다 이공계 인력 양성에 대한 확고한 의지는 없고 정책 혼선으로 위기를 부채질한 정부의 책임은 막중하다. ◇정부ㆍ재계ㆍ학계 모두 나서야 현재 이공계가 처한 위기는 한마디로 `난치성 질환들이 복합적으로 엉켜있는 모습`이다. 자생력을 회복해 병실을 박차고 나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이미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기업부설연구소에서 3년이상 연구경력을 갖고 있는 연구원 1,03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음미해 보면 이공계 인력 양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살펴볼 수 있다. 조사에서 응답자(복수응답)의 87.2%가 `사회적으로 낮은 대우수준과 인식`을 이공계 기피요인으로 꼽았고, `금전 만능주의 세태`(51.0%)가 그 뒤를 이었다. 애로사항으로는 `미래의 불확실성과 연구원 신분보장 불안정`(45.9%), `연구개발을 부수업무로 간주하는 분위기`(34.9%)를 많이 지적했다. 특히 사기진작을 위해 정부가 제시해야 할 정책으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풍토 조성`을 들었다. 허병기 한국공과대학장협의회장(인하대 공대 학장)은 “이공계 살리기는 대학ㆍ정부ㆍ연구소 및 기업 모두가 자기진단과 반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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