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3월13일] 1907년 공황


1907년 3월13일 뉴욕. 월가가 술렁거렸다. 주요 은행들이 자금난에 봉착했다는 악재가 전해진 탓이다. 하락세를 탄 다우공업평균지수의 14일 종가는 76.23포인트. 투자자들은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이틀간 12%가량 빠진 주가를 세계적 대공황의 전조로 봤기 때문이다. 최대 악재는 자금부족. 보어전쟁과 러일전쟁에 들어간 은행 대출금이 회수되지 않는 터에 잉글랜드은행의 금보유고가 줄었다는 소식에 뉴욕 주가가 하락하고 유럽 외환시장에서는 파운드화 가치가 떨어졌다. 변방이던 일본증시까지 폭락세로 접어들었다. 뉴욕증시는 11월까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53.0포인트까지 떨어졌다. 가뜩이나 불안한 시장에 결정적인 찬물을 끼얹은 사람은 하인츠. 서부의 구리광산에서 돈을 모아 월가에 진출, 증권사와 투신사를 사들인 하인츠가 주가조작 과정에서 자금난에 빠지자 시장 전체가 흔들렸다. 구리광산 지분 경쟁 당시 하인츠에게 당한 대자본가들의 복수극이라는 설이 나돌았지만 정작 대자본가들도 현금 부족에 빠졌다. 워싱턴과 캘리포니아ㆍ오클라호마 등 일부 주는 은행 영업까지 정지시켰다. 파리와 로마에서는 은행 창구에서 예금인출 소동이 벌어지고 일부 이탈리아 은행이 파산을 맞기도 했다. 위기의 월가를 구한 사람은 큰손이자 은행가인 J P 모건. 미국 정부가 협조를 당부하자 모건은 돈의 홍수를 일으켜 증권사와 투신사에 자금을 대줬다. 결국 1907년 공황은 모건의 위력을 확인시켜주며 큰 파장 없이 진정됐다. 자존심이 상한 미국 정부는 근본대책 마련에 나섰다. ‘다시는 민간의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다짐의 결과물이 1913년 출범한 연방준비제도(FRS)다. 20세기 최초의 공황이 미국에 중앙은행제도를 안긴 셈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