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김재영의 남성학] 매춘의 역사

신라시대 '源花'가 윤락여성 원조

일부 학자들은 남성은 사냥을 하고, 여성은 자식을 기르는 것으로 역할이 나눠진 원시공동체시대부터 매춘이 있었고, 극단적으로는 결혼은 합법적인 매춘계약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인류는 성행위를 통해 시작되었고 발전했는데, 우리 역사에 있어 윤락여성의 등장은 신라시대 원화가 원조다. 원화(源花)는 화랑제도 이전에 만든 것으로 전국의 미소녀들을 뽑아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던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우두머리인 남정과 준모가 서로 시기하여 폐지되자 300여명의 원화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주 일대에서 술과 웃음을 팔게 되었다. 이후 고려조에 천민인 양수척(揚水尺) 중에 기예 있는 여성을 뽑아 관기로 삼으면서 기생의 역사가 열렸다. 그리고 체계화된 관기제도를 운영했던 조선시대를 거쳐 개화기인 1916년부터는 창기들에게 세금을 걷고 매춘을 공식화적으로 인정하는 공창(公娼)제도가 열리게 되었다. 공창제는 미군정에 의해 1947년 폐지되었지만 이미 본격화된 사창가는 독버섯처럼 번져나갔고 3공화국 때는 미군상대의 외화벌이를 목적으로 해외 연수교육까지 시킨 윤락기업이 설립될 정도였다. 60년대 초에 윤락행위방지법이 만들어 지고, 1968년에는 국내 최대 윤락업소가 밀집된 종로3가를 초토화시켰다. 최근 시행되고 있는 경찰의 대규모 단속의 전형이라 하겠다. 따라서 가무나 연화가 생략된 채, 오로지 본능적 욕구만을 해소하는 현대적인 매춘이 본격화 된 것은 개항으로 생겨난 창기와 한국전쟁으로 양산된 양공주라고 할 수 있다. 양공주들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은 미군정시대 미군부대가 있었던 부평이다. 이후 부산과 경기도 파주의 용주골 등에서 기지촌 문화가 정착되기에 이르렀고 주요 역사 주변은 한국인을 상대하는 집성촌으로 확산되었다. 70년대 산업화시대와 80년대 기생관광 특수를 거치면서 정부의 묵인(?) 하에 급속도로 성장했다. 대규모 공단지역에서 매춘은 남성 근로자들의 욕구를 해소해 줌으로써 안전사고 예방에 기여한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90년대부터는 집성촌 형태에서 유흥업소를 통해 거래되는 점 조직화로 발전되었고, 인터넷의 보급을 타고 도입된 청소년들의 원조교제, 남산이나 탑골공원을 배회하는 박카스아줌마 등 개인형 매춘으로 다양하게 확산되었다. 따라서 21세기 대한민국은 성매매공화국이란 극단적 표현이 가능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된 원인에는 역사적 상황과 불가피한 경제 현실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성매매 근절은 어렵다. 남성학 전문가로서 하나의 처방을 제시한다면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성교육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문제를 개선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무지는 곧 무모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인데, 청소년들에게 실제적인 성교육을 심어준다면 미래 우리 사회의 성문화는 건강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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