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괜찮은 영화를 관객보다 먼저 감상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영화담당 기자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 중 하나일 것이다. 재중동포 출신 장률 감독의 신작 ‘이리’는 기자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영화는 1977년 전주 이리(현재의 익산)역 폭발사고를 소재로 삼았다. 폭발 사고로 부모를 잃은 진서(윤진서)와 오빠 태웅(엄태웅)은 갈 곳 없는 노인들과 함께 익산에 있는 양로원에 산다. 그날의 사건 뒤 이들에게 삶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진서는 정신지능이 낮아 동네에서 ‘미친X’ 소리를 듣고 남자들에게 농락당하기도 한다. 태웅은 슬픈 눈으로 진서를 바라보기만 할 뿐 세상에 대한 원망 조차 토해내지 못한다. 태웅은 어느날 진서를 물에 빠뜨려 죽이려고 바다로 데려간다. 하지만 죽음조차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늙고 병들어 버려진 노인들도 초연한 표정으로 서로를 어루만질 뿐 삶은 그저 남루하기만 하다. 중국과 동남아에서 돈을 벌기 위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도 소외된 사람들이기는 마찬가지. 두고 온 자녀에게 공중전화로 자장가를 불러주는 외국인 노동자의 눈빛은 태웅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듯 싶다. 카메라는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진서를 비추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장면에서 서서히 어두워진다. 스토리가 여느 극영화처럼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관객에게 줄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영화를 본 느낌을 어떻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양로원 할머니들이 장구 장단에 맞춰 부르는 노래에는 삶에 대한 관조와 애잔한 정서가 배어난다. 감독은 30년이 지난 익산의 거리와 그곳의 사람들을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 관객에게 설교하려 하지는 않는다. 다만 30년 전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되묻는다. 느린 화면에 극도로 절제된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이 어우러져 깊은 사색에 빠지게 한다. 13일 개봉 18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