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동십자각] 두 얼굴의 펀드 자본주의

지난 80년대 초 미국의 카이저스틸이 경영난을 겪자 기업사냥꾼들은 카이저스틸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주식 매집세력 가운데는 어윈 야콥스와 같은 인수합병(M&A) 전문기업뿐만 아니라 피델리티 같은 대형 뮤추얼펀드도 끼어 있었다. 피델리티는 자신이 운용하는 펀드들을 내세워 카이저스틸 주식을 대량으로 매집했다. 86년 초 카이저스틸이 배당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사태에 이르자 피델리티는 경영진 교체에 착수했다. 피델리티는 전체 의결권의 3분의1이 넘는 지분을 바탕으로 결국 의사를 관철하는 데 성공했다. 피델리티의 사례에서 보듯 최근 들어 펀드의 규모가 커지면서 펀드가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등장하고 있다. 국내 시장에서도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펀드가 대거 유입되면서 이 같은 펀드 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물론 펀드 자본주의는 자본시장의 파이를 키우고 기업 투명성을 개선시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모펀드나 헤지펀드의 기업 경영권 흔들기가 도를 넘고 있다. 칼 아이칸과 스틸파트너스 연합의 KT&G 공격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불과 7.68%의 지분으로 소유구조가 분산된 KT&G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이들은 보유자산 매각을 통한 고배당을 요구했다. 결국 KT&G는 3년간 2조8,000억원을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 사용하기로 결정해 아이칸 측에 굴복했다. KT&G의 방안대로라면 앞으로 대부분의 이익을 자사주 소각 등에 쏟아 부어야 한다.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성장잠재력을 훼손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은 이래서 나온다. 이처럼 투기자본의 기업 흔들기가 기승을 부리지만 정부는 오히려 느긋하다. 정부 측은 미국도 사모펀드에 대해서는 특별히 규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별도의 규제방안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국가간 자본거래가 자유화되는 추세에서 펀드의 유출입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펀드도 이제는 막강한 권력집단으로 등장한 만큼 최소한 펀드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장치는 있어야 한다. 자금의 성격이나 투자운용 방침, 주주권 행사와 관련된 절차ㆍ목적 등을 자세하게 밝히도록 하는 공시제도 개선도 한번 생각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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