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은 이제 경영권 방어를 위해 투자를 축소하고 단기실적에 치중하는 보수적 경영을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 “정부ㆍ여당이 과연 경제를 살릴 의지가 있는지 믿기조차 어렵다.”
그동안 줄기차게 반대해왔던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내년 발효가 기정사실화되자 경제단체와 주요 대기업 관계자들은 일제히 비판의 수준을 넘은 ‘비난’을 쏟아냈다. 재계의 입장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은 채 법 개정안 처리를 강행함으로써 기업들의 투자가 위축되고 외국자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M&A)이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재계는 그러면서도 어차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경영권 방어를 위한 다각적인 후속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재계 “일할 맛 안 난다”=주요 기업들은 이날 국회의 공정거래법 개정안 통과를 예상이라도 한 듯 체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경제단체는 물론 주요 기업들까지 총동원돼 여야 고위관계자들을 만나 입장을 설명했는데도 문구 하나 바꾸지 않고 밀어붙이기 식으로 통과시키는 데 대해 할말이 없다”며 “기업들을 개혁의 대상으로만 삼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전경련 관계자도 “지금 우리 경제는 내수가 극도로 침체되고 설비투자도 부진해 성장잠재력이 4% 후반으로 떨어지는 등 오일쇼크ㆍ외환위기에 버금가는 심각한 위기상황”이라며 “우리 경제가 2만달러 시대로 도약하느냐, 아니면 1만달러 시대의 덫에 걸려 추락하느냐의 절체절명의 전환기에 빠진 상황에서 커다란 악수(惡手)를 뒀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경영권 방어 ‘발등의 불’=재계는 이번 법 개정으로 외국인들의 경영권 공격에 대한 방어가 당장 발등의 불로 떨어짐에 따라 경영권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짜느라 부심하고 있다.
삼성과 SK 등 주요 그룹은 물론 외국인 지분이 높은 상당수 대기업들도 대주주 지분 및 자사주 매입확대와 우호세력 확보 등을 적극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이 같은 전략을 수행하려면 많은 비용 등이 필요한데다 그나마 경영권 방어에 큰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삼성의 경우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내부지분은 총 23.4%에 달하지만 의결권이 있는 지분은 17.8%에 불과하고 이번 법 개정으로 금융계열사 의결권마저 제한받아 그나마 15%로 줄어들게 된다. 이에 따라 앞으로 의결권 1%를 늘리기 위해서는 비금융계열사들이 무려 10%의 지분을 사들여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 경우 무려 7조4,000억원에 달하는 돈이 필요하다.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국제적 기준에 맞는 투명경영과 기업설명회 강화 등을 통해 주주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 외에 뾰족한 대안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역차별 해소 등 제도개선 필요=경제단체 관계자는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는 식의 경영권 방어는 한계가 있다”며 “기업은 아무리 잘해도 비틀거릴 때가 있고 문제가 생겨 주가가 떨어지면 지금 우호주주도 언젠가 적으로 돌아설 수 있다”고 말했다.
주요 기업들은 이에 따라 ▦차등의결권주 도입 ▦공개매수기간 중 신주발행 허용 ▦제3자 배정방식의 신주발행절차 완화 ▦5% 이상 대량 주식보유자에 대한 감시강화 등 정부 차원의 다양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대량 주식취득시 그 목적을 구체적으로 공시하고 실체를 명확히 밝히도록 하는 등의 방안을 통해 절체불명의 세력에 의한 막후 주식매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계의 다른 관계자는 그러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제도의 상당수가 법을 개정하거나 주총에서 정관을 바꾸지 않으면 도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외국인 지분이 높은 기업들의 경우 이마저 여의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에 따라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 등을 제기해야 한다는 강경론도 적지않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