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 디엠(Carpe Diem)!' 박동호(55ㆍ사진) 세종문화회관 사장의 집무실에 걸려 있는 이 글귀는 라틴어로 '오늘을 충실하게 살라'는 뜻이다. "어느 자리에 있든지 오늘 이 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충실히 살자는 제 자신의 다짐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스스로 나태해질 때마다 '카르페 디엠'을 되새기면 힘이 솟는 것 같거든요." '대한민국의 문화 중심' 세종문화회관을 이끌고 있는 박 사장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는 서울대 식품공학과를 졸업한 공대생 출신이다. 지난 1980년 삼성그룹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에 입사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기술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못했으니까 삼성그룹 내에서 삼성물산이 선호도나 매출 면에서 1위였고 제일제당이 4~5위쯤 됐던 것 같아요. 먹거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던 시절이었으니 전공을 살려 제일제당에서 뭔가 일을 내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요." 제일제당 근무 시절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조미료 '쇠고기 다시마'를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시켰고 아스파탐(인공감미료) 개발 과정에도 참여했다. 식품 분야에서 15년 동안 일하던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1995년 CJ엔터테인먼트 멀티미디어사업부 극장팀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CJ그룹이 엔터테인먼트를 성장의 한 축으로 육성하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지요. 우리나라도 서비스산업이 발전할 것이라는 비전이 있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자리를 옮겼습니다." 부서를 옮긴 그는 국내 최초로 신개념의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 극장을 도입하기 위해 관련 법규 개정, 외국 합작사 설립, 부지 물색 등 신규사업을 도맡아 준비했다. 당시 단성사 등 주요 극장들이 1,000석 규모의 1개 상영관만 운영하던 시절이었으니 신사업 도입을 둘러싸고 실패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음은 물론이다. "해외를 다녀보니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멀티플렉스 극장이 잘되고 있더군요.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지요. 마케팅을 강화하고 각 상영관의 가동률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게 관건이었지요." 하지만 예상치 못한 위기가 왔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환율이 두 배 이상 치솟으면서 막대한 환차손이 발생한 것이다. 사업 자체를 접을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결단으로 국내 멀티플렉스 극장 1호인 CGV강변이 문을 열게 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첫해부터 흑자가 난 것. 멀티플렉스 극장은 한국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덕분에 한국 영화도 2000년대 들어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됐다. CJ엔터테인먼트 대표와 CJ푸드빌 대표로 일하던 그는 2009년 말 세종문화회관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2004년 CJ엔터테인먼트 대표로 재직할 때 공연 업무로 세종문화회관과 인연을 맺었지요. CJ엔터테인먼트의 주된 사업이 영화와 공연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세종문화회관 측의 제의가 왔을 때 망설이지 않고 자리를 옮기게 됐습니다. 공연시장도 영화 못지않게 성장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박 사장이 외친 취임 일성은 글로벌 공연예술기관으로의 도약이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공기업 성격의 조직이라 다소 나태한 조직문화가 깔려 있더군요. 우선 분위기부터 바꿔보자고 생각하고 ▦창의적인 조직경쟁력 강화 ▦고객 중심의 컬처 플렉스 조성 ▦예술단 발전전략 구축 ▦사회공헌활동 강화 등 네 가지 전략을 마련해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박 사장은 특히 세종문화회관 산하 9개 예술단의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춰 예산의 절반 이상을 쏟아붓고 있다. 예술단별로 특화된 레퍼토리 개발작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1999년 재단법인으로 출범한 후 처음으로 예술단 노조와의 합의를 통해 개인기량평가가 포함된 단원평가제를 도입했다. 아울러 예술단의 부족한 연습실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예술동 증축공사도 진행하고 있다. 박 사장은 서울시뮤지컬단의 뮤지컬 '투란도'와 서울시무용단의 창작무용극 '백조의 호수' 등 이미 관객의 호평을 받은 작품들은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 세계시장에 내놓는다는 복안이다. "고전 발레의 대명사인 '백조의 호수'는 서울시무용단이 한국적 춤사위로 재해석해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이 작품은 오는 11월 열리는 상하이아트페스티벌에도 공식 초청을 받아 개막 무대를 장식하는데 세계적인 교향악단이나 무용단이 참가하는 페스티벌에 초청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죠." 한국 예술단이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레퍼토리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ㆍ세계화와 현지화의 합성어)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세계시장에서 문화의 정체성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는 만큼 전통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서양의 문화와 융합해 창의적인 문화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즉 정체성과 차별성, 그리고 소통이 기반이 되는 문화 콘텐츠를 생산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내년에는 9개 예술단에 소속된 500여명이 모두 참여하는 종합구성작품을 만들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한 단체의 공연으로 만족할 게 아니라 각자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융합해 규모나 수준 면에서 월등히 우수한 공연을 만들고 싶어 현재 기초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그는 "그동안 공연의 질과 규모에 목말랐던 만큼 단원들도 우리만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기업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옮겨오면서 연봉은 얼마나 낮아졌는지도 궁금했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CJ그룹 시절에 비해 연봉이 형편없이 깎인 것은 사실"이라고 에둘러 말하는 박 사장은 하지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찾았다고 강조한다. "민간에서 배부른 자리에 있다가 세종문화회관에 오면서 처음에는 힘든 점도 없지 않았지만 한국 공연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는 안목과 사명감을 가지고 공적 업무를 할 수 있는 행정능력은 민간기업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입니다. 지난 2년간 세종문화회관의 시스템을 정비하는 작업을 추진했던 만큼 내년부터는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것으로 믿습니다." 박 사장의 '카르페 디엠' 철학이 세종문화회관의 미래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꿔놓는 밑거름이 될지 주목된다.
|
세종문화회관 주축 48개 기관 합동 출범 공연·전시등 티켓 예약·발권 원스톱 가능 뉴욕 브로드웨이와 런던 웨스트엔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공연장ㆍ박물관ㆍ미술관 등 다양한 문화예술공간이 한데 모여 있어 원스톱으로 문화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매년 수만명의 국내외 관광객들이 이곳만의 공연과 전시를 보려고 방문한다. 이를 본떠 세종문화회관을 중심으로 한 광화문 일대에 조성한 '세종벨트'가 한국의 문화예술 대표 브랜드로 떠오르고 있다. '세종벨트'는 세종문화회관을 포함한 48개 문화예술기관의 복합문화연합체로 서울을 찾는 관광객과 시민들이 편리하고 저렴하게 문화예술을 즐기도록 한다는 취지로 생겨났다. 세종문화회관이 주축이 돼 지난해 출범한 세종벨트는 지난 8월 광화문광장 해치마당에 '통합 티케팅&인포센터'를 마련했다. 뉴욕 브로드웨이 타임스스퀘어나 런던 웨스트엔드의 'tkts'처럼 공연ㆍ전시 티켓 구매뿐 아니라 패키지상품의 티켓 예약과 발권이 원스톱으로 가능하다. 한국어ㆍ영어ㆍ일본어ㆍ중국어 4개국 언어로 소통이 가능한 전문 코디네이터들이 배치돼 프로그램을 안내해준다. 또한 러시티켓(당일 공연에 한해 잔여좌석을 파격적으로 할인해 선착순으로 판매하는 티켓)을 도입해 해외 관광객뿐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세종벨트가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마련하는 '광화문 S-Day'에서는 1만원으로 인기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만원의 꿈'을 비롯해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4월부터 10월까지 개최하는 '광화문 문화마당'은 외국인 관광객과 시민들이 함께 즐기는 대한민국 대표 문화예술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 앞에 마련된 특설무대에서 서울의 야경을 배경으로 국악ㆍ재즈ㆍ팝ㆍ대중음악ㆍ록ㆍ무용ㆍ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펼쳐지는 '광화문 문화마당'은 실내공연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정취를 선사하며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박동호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세종문화회관을 중심으로 광화문광장 일대를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공연예술의 마당으로 만들어 궁극적으로 서울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의 랜드마크로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
■ 세종문화회관 사회공헌활동 활발 세종문화회관의 역사는 한국의 공연예술사와 맥을 같이한다.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은 현재 서울시의회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로 지난 1961년 우남회관과 시민회관으로 출발해 1978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종문화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서울시 산하기관인 세종문화회관은 공연 인프라가 척박하던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문화예술을 이끄는 선도자적 역할을 했으며 1999년 재단법인으로 독립했다. 시민을 위한 문화예술의 메카를 지향하는 만큼 세종문화회관은 문화를 통한 사회공헌활동을 다양하게 진행하고 있다. '함께해요! 나눔예술'은 서울시국악관현악단ㆍ서울시무용단ㆍ서울시합창단 등 산하 9개 예술단이 중심이 돼 고아원ㆍ병원ㆍ복지시설ㆍ학교ㆍ구민회관을 직접 찾아가 문화예술을 접하기 어려운 이웃에게 무료로 공연을 펼쳐주는 프로젝트다. 2004년 시작된 이래 지난해 말 현재 1,276회의 공연에 약 86만명이 함께했다. 공연예술의 문턱이 높다고 느끼는 시민들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마련된 문화충전 프로젝트 '천원의 행복'은 2007년 1월부터 입장료 1,000원이라는 파격가로 공연을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13만명이 관람했으며 프로그램의 인기를 반영하듯 평균 8대1의 높은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세종나눔 앙상블'은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했거나 취미로 연주활동을 펼쳐왔던 일반인을 모집해 음악을 통한 봉사활동을 펼친다는 취지로 2008년 창단한 아마추어 클래식연주단이다. 의사ㆍ약사ㆍ변호사ㆍ교사ㆍ엔지니어ㆍ최고경영자(CEO) 등 다양한 직업의 20~50대 총 47명으로 구성돼 있다. 2009년 7월 세종M씨어터에서 열린 창단기념 음악회와 2010년 7월 정기연주회의 공연 모금액 전액을 한국 해비타트의 '사랑의 집 짓기 운동'에 기부하기도 했다. 또 세종문화회관이 구성한 소외계층 어린이와 청소년으로 구성된 '세종 꿈나무 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악기 구입비용에도 큰 힘을 보태는 한편 단원들이 이 오케스트라의 자원봉사자 겸 멘토 역할을 하면서 재능기부를 실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