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술로 적발 불가능" 유전자 도핑 막기 비상

유전자 도핑은 생명을 담보로 한 도박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돈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비양심적 과학자들과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계 최고가 되려는 선수들이 존재한다.

2008 베이징올림픽을 5개월가량 앞두고 세계반도핑기구(WADA)에 비상이 걸렸다. 기존의 모든 반(反)도핑기법을 무력화할 ‘유전자 도핑’이 데뷔 무대로 베이징올림픽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를 이식해 인체의 운동능력을 근간부터 바꿔버리는 이 도핑은 새로 주입된 유전자가 선수의 정상 유전자로 완벽하게 변신, 현존하는 검사기법으로는 적발할 수 없다. WADA는 경기 이후 8년까지 도핑 샘플 요청이 가능하다는 규정을 근거로 선수들을 압박하고 있지만 이 전략이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도핑계의 다크호스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의 벤 존슨, 2000년 시드니올림픽의 메리언 존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의 저스틴 게이틀린 등 운동 선수들의 금지약물 복용, 즉 도핑(doping)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제는 국제대회라면 으레 한두 명쯤 도핑 사실이 적발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오는 8월 개막하는 2008 베이징올림픽도 도핑의 위협에서 안전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정확히 말해 이번 올림픽이야 말로 역대 최악의 도핑올림픽으로 전락할 개연성이 높다. 기존의 모든 도핑테스트를 무력화할 수 있는 도핑계의 차세대 주자 ‘유전자 도핑(gene doping)’이 베이징을 데뷔 무대삼아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유전자 도핑은 말 그대로 유전자를 활용한 도핑 기술이다. 스테로이드 같은 약물로 일시적인 경기력 향상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근력이나 지구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 유전자를 이식, 신체의 운동능력을 근간부터 바꿔버리는 것이다. 마치 구형 컴퓨터를 최신 하드웨어로 업그레이드하듯 신체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SF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이 도핑 기법이 현실적 문제로 대두된 것은 2004년. 미국의 한 연구팀이 단 하나의 유전자를 변형해 지구력을 극대화한 일명 ‘마라톤 쥐’를 개발해내면서 유전자를 제어해 인체능력을 강화할 수 있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탐지 불가능한 꿈의 도핑 연구자들은 추가 연구를 통해 특정 유전자를 인체에 무해한 바이러스에 삽입, 사람에게 주입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이 지닌 원래의 유전자와 치환할 수 있음을 실증했다. 특히 이렇게 주입된 바이러스는 인체세포 안에서 스스로를 복제해 피(被)실험자의 정상적인 DNA로 완벽히 변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유전자와 새로 주입된 유전자의 식별이 불가능해진다는 얘기다. 완벽한 도핑을 꿈꾸는 선수들에게는 유전자 도핑이야말로 적발 위험이 전혀 없는 궁극의 기술인 셈이다. 설령 신체 전체가 아니라 근육 등 특정 부위에만 작용하는 시술의 경우에도 소변ㆍ혈액 등 평범한 검사로는 적발할 수 없으며 유전자가 주입된 부위의 조직 샘플이 필요하다. 하지만 도핑 검사를 위해 선수를 수술대에 눕혀놓고 신체 이곳저곳의 조직을 떼어낼 수는 없다. 의심이 가더라도 현존하는 기술로는 유전자 도핑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물론 이 연구의 당초 목표는 도핑 기술 개발이 아니었다. 연구자들은 낭포성 섬유증 등 유전자 이상으로 유발된 난치성 질환의 치료를 위해 결점 있는 유전자를 정상 유전자와 교체하는 ‘유전자 치료법(gene therapy)’을 개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유전자 치료와 유전자 도핑이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하다는 점에서 신개념 도핑 기법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도핑 가능 유전자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유전자들이 도핑에 악용될 수 있을까. 유전자 치료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 캠퍼스(UCSD)의 유전학자 시어도어 프라이드먼 박사에 따르면 그 숫자만도 무려 2만여종이 넘는다. 그는 “2004년 게놈 프로젝트로 인간의 모든 유전자 지도가 공개된 후 지금까지 인체의 운동능력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전자는 모두 2만5,000여종 가량 발견됐다”며 “궁극적으로 이들 모두는 도핑에 쓰일 개연성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밝혔다. 이중 현재 세계반도핑기구(WADA)로부터 요주의 대상으로 분류된 유전자만도 IGF-1, AMPK, MGF 등 10여종 이상이다. 성장촉진에 관여하는 IGF-1 유전자는 근육세포의 크기와 함께 숫자까지도 늘려줘 근력 향상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당뇨병과 비만 치료제로 주목 받고 있는 AMPK는 근육이 글리코겐을 축적하는 데 영향을 미쳐 지구력 상승에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MGF는 근육의 피로를 낮추고 회복력을 증진시켜준다. ACE-1은 체력 증진, 지구력 상승에 좋고 근육의 산소활용 효율도 높여준다. 특히 인체 내에서 혈액세포의 분배를 통제하는 HCP유전자는 WADA가 가장 경계하는 대상 중 하나다. 적혈구 생성을 촉진해 근력강화 효과를 누릴 수 있는데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에리스로포이에틴(EPO)’ 호르몬 도핑을 대체할 최적의 유전자 도핑 물질로 주목 받고 있다. 목숨을 건 도박 그런데 이렇듯 유전자 도핑으로 신체적 취약점을 보강하고 운동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시력이 나쁜 선수들이 라식 수술을 받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에 대해 호주 반도핑협회의 대니얼 아이히너 박사는 “WADA에서 도핑과 의료행위를 구분하는 핵심적 잣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수들의 안전”이라며 “이 점에서 유전자 도핑은 기존의 약물 도핑과 다를 바 없는 ‘목숨을 건 도박’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유전자 치료 분야 자체가 초기 단계에서 도핑 가능 유전자 중 그 부작용에 대해 다각적인 연구가 수행된 것은 단 몇 개에 불과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나마 이들조차 암ㆍ근위축증 등 치명적 부작용이 다수 발견됐다. 실제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시했던 한 HCP 유전자 실험에서는 적혈구 숫자가 너무 급격히 증가해 혈액이 젤리처럼 굳어지면서 원숭이가 모두 폐사했다. 2002년 프랑스에서 면역결여장애 치료를 위해 실행된 유전자 치료 실험에서도 11명의 환자들에게 백혈병이 나타났다. 즉 인위적으로 유전자를 대체하는 유전자 도핑이 중ᆞ장기적으로 선수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올림픽이 유전자 도핑으로 얼룩질 수 있다는 우려는 조금도 꺾이지 않고 있다. 아이히너 박사는 “세상에는 돈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비양심적 과학자들과 목숨을 걸고라도 세계 최고가 되고 싶은 선수들이 존재한다”며 “이들에게 유전자 도핑의 위험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조건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유전자 도핑을 잡아라 WADA는 2003년 유전자 도핑 금지 조항을 신설한 이래 그 위험성과 부도덕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또한 각국의 유전공학 및 반도핑 전문가들과 공조해 이를 적발할 수 있는 첨단 반도핑 기술 확보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WADA가 여기에 투입한 금액만도 약 800만 달러에 달한다. 유전학자들은 유전자 이식을 할 때 전달 매개체로 쓰이는 바이러스를 검출하는 방법 등으로 머지않아 유전자 도핑 여부를 가려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문제는 몇 개월 앞으로 다가온 베이징올림픽이다. 수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뚜렷한 성과물이 도출되지 않아 적어도 베이징올림픽은 유전자 도핑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프라이드먼 박사도 “머지않아 EPOㆍ테스토스테론 등 기존 도핑 약물처럼 유전자 도핑 또한 혈액과 소변만으로 검사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며 “하지만 베이징올림픽 이전까지 신뢰성 있는 검사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WADA는 유전자 도핑 검사기술이 확보되기 전까지 공백기 동안 선수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카드를 꺼내 들었다. 경기 후 8년 이내에는 언제든지 선수들에게 도핑 샘플을 요청, 도핑이 확인되는 즉시 메달을 박탈할 수 있다는 규정이 바로 그것이다. 딕 파운드 전 WADA회장은 “베이징올림픽 현장에서 유전자 도핑 선수들을 적발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면서 “하지만 이것이 그 선수의 비밀을 영원히 보장한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지금 중요한 것은 도핑을 한 선수는 반드시 적발되고야 만다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심리적 압박이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할지는 알 수 없다. 칼자루를 쥔 것은 WADA가 아니라 선수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