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글로벌 포커스] 조세피난처 사라지나

美·EU등 규제 강화 목소리 고조<br>OECD도 G20 앞두고 '블랙리스트' 작성 압박에<br>스위스등 "은행 비밀주의 완화" 사실상 항복 불구<br>"모두 문닫으면 더 깊은 지하서 번성"시각 지배적


전 세계 조세피난처에 대한 국제적 제재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각국의 은행 비밀주의 완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오트마르 하슬러(가운데) 리히텐슈타인 총리가 지난 12일 기자 회견을 열고 외국 조세 당국과의 고객 세무정보 협력 방침 등을 천명하고 있다.리히텐슈타인=AP연합뉴스

'케이먼 군도, 버진 아일랜드, 바베이도스, 리히텐슈타인, 라부얀…' 대략 30여개국으로 추산되는 대표적인 조세피난처(Tax Heaven)들이다. 헤지펀드가 세금부담없이 글로벌 금융시장을 헤집고 다니게 만들어준 '병참기지'이며, 최대 11조5,000억달러(1,,610조원 상당)의 조세회피 자금이 정착해 있는 '베이스 캠프'다. 조세피난처가 미국 및 유럽 각국으로부터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범이나 종범쯤으로 집중 비난받기 시작했다. '세금없는 천국'은 과연 '금융범죄의 온상'인가 아니면 금융위기로 날카로워진 각국의 신경질이 만들어낸 '희생양'인가. 내달 2일로 다가온 선진ㆍ신흥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 이번 회담은 미ㆍEU를 주축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타개하기 위한 국제 공조방안이 구체화될 것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동시에 이번 회담을 계기로 그동안 감시의 시선 밖에 있던 조세회피처에 대한 글로벌 규제가 작동할 것인지 여부도 관건이다.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G20정상회담에 맞춰 각국 조세당국에 협조하지 않는 국가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 중이다. 이 리스트에 올라가면 국제 금융거래에 있어 보다 혹독한 제재를 당할 가능성이 크다. (OECD의 기존 블랙 리스트에는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안도라 만 포함돼 있음) 아직 공개되지 않은 신규 블랙 리스트에는 카리브해, 태평양의 군도 국가 등 약 30여 개국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스웨덴 재무장관은 "스위스ㆍ리히텐슈타인ㆍ안도라 등 유럽 3국이 '신규 블랙 리스트'에 오르지 않았다"며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않을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일 정도다. 조세피난처가 전 세계로부터 집중 비난받기 시작한 까닭은 글로벌 금융거래의 불투명성 때문이다. 각국은 현재 진행중인 금융위기를 글로벌 투기자본이 통제와 규제영역 밖에서 활동한 결과물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조세피난처에 대한 규제 강화논의는 그동안 이들이 마련해준 담요 밑에서 활동했던 투기자본의 움직임을 관찰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 100대 상장기업 중 무려 83개 기업이 조세피난처나 은행 비밀주의 시행 지역에 자회사를 두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미 정부의 구제 금융이 투입된 금융기관 등도 인근 케이먼제도의 90여개를 포함, 총 427개 자회사를 이들 지역에 두고 있어 세금 회피가 가능한 상황이다. OECD 추정치에 따르면 조세피난처에 몰려가 있는 글로벌 금융자산은 최대 11조5,000억 달러. 이들 조세회피처가 은행 비밀주의를 포기하거나 완화해 조세 협력 기준을 준수할 경우 '검은 돈'의 은닉이 사실상 불가능해져 세계 각국의 금융통제시스템이 훨씬 단순 명쾌해진다. 경제 위기 해법을 놓고 대립각을 세우는 미국과 유럽연합(EU)마저 조세피난처들에 대한 규제에는 한 목소리를 낼 정도.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전세계 조세 피난처들은 잇달아 '폐업신고'를 해야 할 위기다. 실제로 스위스ㆍ리히텐슈타인ㆍ안도라 등은 최근 은행 비밀주의 완화를 선언하며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한푼의 세수라도 더 확보해야 하는 각국의 재정형편 역시 조세피난처를 규제해야 할 또 다른 이유다. 금융위기 이후 막대한 재정을 방출하며 위기방어에 나서고 있는 각국으로선 세수를 확대할 여지를 최대한 넓힐 필요가 커졌다. 그동안은 사실상 묵인해 온 조세 피난처행 '도피 자금'에 대해서도 이제는 세금을 내놓으라고 주문하는 모습이다. 특히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 등의 은행 비밀보호 제도는 오랜 세월 유지되어 온 전통으로 이들 나라의 주권이나 자존심처럼 인식된 측면이 있어 관련 제도의 폐지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시각도 있었다. 따라서 이번 금융위기가 국외 소득에 대해 세금을 물리지 않는 조세 피난처나 은행 비밀주의 시행 국가에 대해 재갈을 물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선진국들이 조세 피난처 규제 강화에 잇따라 합의한 이면에는 "G20 정상회의에서 위기 해법에 관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선진국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경제 위기 해소 방안으로 미국은 추가적인 재정투입을, EU는 은행시스템 규제 강화를 각각 앞세워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 세계 금융 중심지인 미국은 은행 시스템 규제 강화가 자국 은행업의 헤게모니 상실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반면 EU는 유럽중앙은행(ECB)의 규정에 따라 재정정책의 주요 수단인 국채 매입이 사실상 불가능해 추가 재정 투입이 어려운 형편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미국의 관련 입법 예고에 이어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이 잇달아 제재 필요성을 새롭게 주창하고 나선 점이 이 같은 배경과 무관치 않다고 보고 있다. 벌써부터 제재 예상국에서는 자신들이 '불공정한 타깃'이 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기실 이들 조세 피난처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소국들이 대부분이다. 세계 각국의 이번 공조움직임이 지구촌에서 조세피난처를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는 시각이 더 지배적이다. FT는 "조세피난처의 등장은 자국의 고강도 세금 체제를 회피하려는 선진국들의 오랜 바램에서 시작된 것"이라며 "한곳을 문을 닫으면 다른 곳이 번성할 것이며 모두가 문을 닫게 되면 (자금은) 더 깊은 지하로 숨어 들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WSJ도 유럽에서 은행비밀주의가 무너질 경우 홍콩, 싱가포르, 두바이 등이 오히려 혜택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FT는 또한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가 겉으로는 조세 피난처에 대한 규제 강화를 외치고 있지만 자치령 등까지 모두 포함할 때 37개 의심국가 중 11개 국이 영국과 관련된 실정이라며, 전 세계 사모투자 산업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스위스에 이어 2위에 달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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