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90년 역사를 가진 기계주물 업체 봉신(현 심팩인더스트리)이 매물로 나왔다. 2006년 해운업에 진출하며 재무상황이 악화된 봉신은 기업회생절차를 밟으며 새 주인을 찾아 나섰지만 인수가격이 맞지 않아 번번이 매각이 무산됐다. 1년여간 이어진 매각작업 끝에 가까스로 프레스 전문 중견기업 심팩이 봉신을 인수했다. 새 주인을 만난 봉신은 고급주물 전문기업으로 입지를 굳히며 일본 미쓰비시와 고베스틸·히타치 등에 납품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봉신의 매각작업이 올해 2월 이후 진행됐다면 새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주조업계의 관측이다. 2011년에 이어 올 2월 주조 품목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재지정하면서 동반성장위원회는 신규 진입 자제 대상을 대기업(상호출자 제한 대상 기업집단)에서 중견기업으로 확대했다. 새로운 권고사항에 따라 중견기업인 심팩은 현재 기준으로는 봉신을 인수할 수 없다. 앞으로 최소 3년간 봉신 인수가 주조업계 마지막 인수합병(M&A)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한쪽에서는 육성정책을 펴며 예산을 투입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시장 진입과 확대를 막는 엇박자 정책 속에 중견기업들이 경영전략 수립에 혼선을 빚고 있다.
올해 2월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재지정된 주물이 대표적이다. 주물산업은 열악한 작업환경과 전문인력·기술력 부족, 기술개발 투자여력 부족 등으로 성장이 정체돼 있는 뿌리산업이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7월 '뿌리산업 진흥과 첨단화에 관한 법률' 개정을 통해 중소·중견 뿌리기업의 생존과 경쟁력 확보를 위한 종합지원방안을 마련했다. 그런데 동반위가 올 2월 주조 업종의 적합업종 재지정 과정에서 신규 진입과 확장 자제 대상에 중견기업까지 포함시켜 문제가 생겼다. 수도권 입지규제 탓에 지난해 한 지방자치단체와 협약을 맺고 올해 공장이전을 준비 중이던 중견 주조기업 A사는 이전계획을 완전히 접게 생겼다. 대표적인 3D업종으로 꼽히는 주조산업이 선진업체와 중국 후발업체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연구개발(R&D)과 인력 투자를 통해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투자여력이 있는 중견기업과 대기업의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뿌리산업 육성정책도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한 주조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추격과 근로자 고령화로 성장기반이 약해지고 있는 주조산업은 중소형 업체 간 M&A를 통한 구조조정으로 생존전략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그런데 중소기업들의 인수여력이 없는 가운데 중견기업마저 시장진입을 제한하는 바람에 기술력을 가진 기업들의 폐업이 속출하고 숙련노동자들도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2012년부터 중소업계에서 적합업종 지정을 추진하고 있는 소프트웨어(SW) 산업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SW 업종 중소단체인 한국정보산업협동조합은 동반위에 응용SW 개발·공급업 가운데 5억원 미만 사업을 적합업종으로 지정해달라고 신청했다. SW업계에서는 이미 SW산업진흥법 개정으로 중견·대기업의 민간 부문 참여가 제한돼 있는 상황인데 SW 업종을 적합업종으로 지정할 경우 국내 SW 기업의 경쟁력이 악화되면서 국내 시장에서 외국계 기업의 배만 불려 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IDC에 따르면 국내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장에서 더존비즈온 등 토종 SW를 공급하는 기업들의 점유율은 22.1%로 외산 제품 점유율(50.7%)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미래창조과학부가 창조경제 구현을 위해 추진 중인 6대 전략에 SW가 핵심과제로 포함됐고 상당수 토종기업들이 월드클래스300기업으로 지정돼 지원을 받고 있지만 정작 토종 SW 기업 가운데 국내에서 민간시장과 공공시장을 아우르며 활발하게 사업할 수 있는 기업은 없다"고 꼬집었다.
정부가 창조경제 활성화를 위해 중견·대기업의 M&A 활성화를 독려하고 있는 가운데 기술력 있는 벤처기업을 인수했다가 '벼룩의 간을 빼먹는' 위장 중소기업으로 낙인이 찍힌 사례도 있다. 위장 중기란 공공 조달시장에서 중소기업으로 위장해 '중소기업 간 경쟁제품' 해당 사업을 따낸 중견·대기업을 뜻한다. 그런데 올 초 중소기업청이 발표한 위장 중기 리스트에는 기술력이 우수하지만 일시적인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들을 인수했다가 리스트에 포함된 기업이 있었다. 해당 기업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앞장서 M&A를 독려해놓고 막상 기업들을 인수하니 편법으로 공공 조달시장에 참여하려고 중소기업 확인을 받은 기업들을 인수했다고 낙인을 찍어버렸다"며 "이런 상황에서 어떤 기업이 M&A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