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청년들이 앓고 있다] 2부:현장에서 찾는 해법 <3> 이탈리아 패션의 경쟁력, 청년 디자이너

피렌체 공방서 도제식 수업… 패션디자인스쿨이 산학연계 역할

혼이 담긴 전통기술에 현대적 디자인 감각 결합

신흥국 저가공세 뚫고 고품질 제품으로 승승장구

경영노하우·고객기반 나누는 '공유경제'도 활발

높은 청년 실업률에 시달리는 이탈리아에서는 최근 들어 청년들의 공동 창업 공간인 '코워킹 스페이스'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곳에 모인 창업자들은 사무기기와 공간뿐만 아니라 창업 노하우, 고객, 마케팅 기법 등을 공유하며 서로 돕는다. 지난달 밀라노의 대표적인 코워킹 스페이스인 '로긴'에서 청년 창업가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작업하고 있다. /이혜진기자

지난달 말 다녀온 밀라노는 남성복 패션위크(men's fashion week) 전시장을 찾은 세계 각국의 디자이너·바이어로 북적였다. 패션위크 전시장의 각 부스에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바이어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옷과 가방·신발 디자인을 설명하느라 분주하다. 흰 티셔츠에 재봉틀로 수공예 자수를 놓은 것이 특징인 의상으로 전시장을 차린 지미 루스(35)씨는 패션스쿨을 졸업한 후 피렌체 공방에서 수년 동안 어시스턴트로 일한 뒤 자신의 브랜드를 창업했다. 그는 "피렌체에는 가죽 가공, 재단, 재봉, 바느질 등 특정 분야의 장인이 가족 대대로 운영하는 소규모 공방이 많다"며 "수백년 전통의 재봉틀 자수 기술을 통해 나만의 디자인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청년 실업이 가장 심각한 국가 중 하나다. 하지만 패션 산업만 놓고 보면 상황이 다르다. 청년 창업이 부쩍 늘고 있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장인의 혼이 담긴 전통기술과 현대식 디자인 교육 인프라를 기반으로 창업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패션 산업은 중국 등 신흥국의 저가 공세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최근 고품질의 차별화된 디자인 제품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전통 장인에게 배워 패션 회사 창업=대대로 가업을 이어온 이탈리아 장인들과 명품 섬유 클러스터는 청년들이 세우는 패션 스타트업의 든든한 원군이다. 최근 들어 장인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한 젊은 디자이너들의 공방행이 늘고 있다. 고되고 월급이 작은 도제식 공방 교육은 한동안 청년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어떤 패션스쿨이나 회사에서도 배울 수 없는 손기술의 가치에 눈을 뜨는 디자이너들이 늘고 있다. 루스씨는 "공방에서 도제식 훈련을 받기 위해 이탈리아뿐 아니라 일본 등 아시아에서도 유학을 온다"고 전했다. 중국 등 신흥국에서 생산되는 대량으로 생산되는 패스트패션 브랜드의 기성품이 전세계 의류 시장을 석권하면서 오히려 느리게 소량으로 생산되는 고급 제품이 경쟁력이 발휘하는 경향도 재능 있는 청년들의 창업을 북돋우는 배경이다.

이탈리아 중북부에 산재돼 있는 섬유·소재 클러스터는 명품 기업뿐만 아니라 디자인 능력 하나로 1인 패션회사 창업이 가능케 하는 인프라로 역할 한다. 지역별로 코모에는 실크, 카르피에는 니트, 베로나에는 신발 등의 클러스터가 형성돼 있으며 이곳에는 고급 소재를 생산해내는 수백년 전통의 강소기업이 몰려 있다. 카모(CAMO)라는 고급 남성복 브랜드의 창업자이자 디자이너인 스테파노 우게티(41)씨는 8년 전 패션 회사를 창업했다. 디자인 회사에서 일했던 그는 패션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와 열정 외에는 아무런 물리적 기반이 없었다. 그러나 각종 인프라가 갖춰져 있었기에 자신만의 브랜드 창업이 가능했다. 그가 의상의 디자인을 만들어내면 고급소재는 이탈리아의 각 클러스터에서 조달하고 제작은 공방에 주문한다. 판로는 피렌체·밀라노 등의 패션쇼를 통해 세계 각국의 바이어를 만나면서 개척했다. 우게티씨는 "고급제품일수록 소재가 중요하다"며 "내 고향 비엘라 지역에는 질 좋은 울을 생산해내는 공장들이 많아 신사복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디자인·제작·판매·마케팅 등을 스스로 챙기는 1인 패션 회사로 시작해 고급스러우면서도 편안한 디자인이 세계 바이어들의 인정을 받아 20여국 진출에 성공했다.


◇패션스쿨, 산학 연계 고리 역할=이탈리아가 패션 강국으로 지위를 유지하며 산업 생태계를 키워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인재를 양성하는 패션디자인 교육기관이다. 교육과정이 철저히 현장 중심, 실습 중심으로 이뤄져 있으며 강사도 대부분 현장 전문가여서 자연스럽게 산학 연계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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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시내 한복판 상점으로 가득한 거리에 위치한 인스티투토 마랑고니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패션디자인 스쿨이다. 7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에는 약 2,700명에 달하는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들이 패션뿐 아니라 인테리어 및 상품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다. 수업은 이론보다는 디자인과 제작 등 실습 위주로 운영된다. 5층짜리 학교 건물에는 의상 제작실, 분장실, 사진스튜디오가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당연히 강사들도 80%가 현직 디자인 업계 종사자다.

파울로 메로니 학장은 "밀라노 패션 회사에서 일하는 현업 전문가들이 최신 트렌드와 디자인 노하우를 학생들에게 전수하고 있다"며 "졸업 이후 조르지오 아르마니, 돌체앤가바나, 펜디 등 세계적인 패션회사에 취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마랑고니 외에도 분야별로 특화된 패션디자인 스쿨은 '메이드 인 이탈리아' 저력의 배경이 되고 있다. IED는 패션뿐 아니라 다양한 분의 디자인 하우스로 유명하며 도무스는 건축디자인, 폴리모다는 패션마케팅에 특화돼 있다.

패션 기업도 디자인 인재 육성에 적극적이다. 막스마라는 별도의 재단을 설립, 젊은 디자이너의 디자인 교육프로그램, 인턴십, 세미나, 디자인 연구개발 등을 지원해오고 있다. 이 밖에 베네통·아르마니 등도 이탈리아 패션스쿨과 제휴해 인턴십뿐만 아니라 장학금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스스로 일자리 만든다=의류나 섬유 기업 외에도 최신 정보기술(IT)을 활용해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가는 청년들도 늘고 있다. 이들을 위해 최근 이탈리아에서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공간이 코워킹스페이스다. 커다란 창고나 집을 개조해 만든 공동 창업공간인 코워킹스페이스는 저렴한 비용에 3D프린터·인터넷·컴퓨터 등의 기본적인 시설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청년들이 서로의 노하우를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 역할도 해내고 있다. 밀라노에만 약 60여개의 코워킹스페이스가 운영되고 있으며 이탈리아뿐 아니라 런던·파리·뉴욕 등 세계 곳곳에서 세워지고 있다. 밀라노에 위치한 대표적인 코워킹스페이인 '로긴'에는 건축, 소셜미디어 마케팅, 웹사이트, 디자인 등과 관련 약 130명의 청년 창업자들이 꿈을 키우고 있다. 이곳에서 웹디자인 사업의 둥지를 튼 마시모 카라로씨는 "창업자들끼리 서로 고객을 공유하고 노하우를 전수하는 등 공유경제의 터전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밀라노시 정부에서도 청년 창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코워킹스페이스 입주 창업자에 대해 월 임대료 중 일정 금액을 보조해주고 있다.

이곳 운영자인 파비아나 플라보니 매너저는 "금융위기 이후 청년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면서 "정부가 내 삶을 책임져줄 것이라는 기대를 접고 스스로 개척해가자는 생각을 가진 청년들이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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